▲민청협에서 발행한 회보 표지들. 창간호는 표지 없이 6페이지로 단출하게 발행했으나, 2,3,4호는 각각 16, 26, 28페이지로 늘어나면서 점차 내용이 다채로워졌다.
민청련동지회
[전망]에서 주장하는 학생운동의 선도적 정치투쟁은 사회운동으로 확산될 필요가 있었다. 82년 말부터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던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는 정부당국의 철저한 언론통제로 신문과 방송에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고 있었다. 광주학살의 실상도 국민들에게는 철저히 은폐되었고, 그에 대한 정보와 자료들은 일부 운동권 사람들 사이에서만 은밀히 유통될 뿐 국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는 노동자, 농민, 빈민 등 민중운동도 그 생존권 주장을 대변하고 엄호할 세력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었다.
사회에서 이러한 공개정치투쟁을 담당할 세력은 역시 학생운동에서 단련된 청년들일 수밖에 없었다. 80년 5.17 쿠데타로 다시 제적되어 사회에 나온 복학생 청년들이 수백 명에 이르렀기 때문에 인적 자원은 충분했다. 문제는 유신체제에 버금가는 전두환 정권의 폭압통치 아래에서 과연 공개정치투쟁단체가 생존 가능할 것인가, 그리고 가능하다면 누가 그 일을 맡을 것인가에 있었다.
구월동 사람들은 1983년 초부터는 공개투쟁의 가능성에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모두가 수배상태였기 때문에 수사기관의 동태에 특히 민감했다. 그런데 1983년 들어서면서 변화가 감지됐다. 많은 수배자들의 수배가 해제되었고, 수배자들에 대한 수사기관의 추적도 완화된 듯 보였다. 이러한 변화가 이들로 하여금 공개투쟁단체의 활동이 가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던 것이다.
이때 박우섭이 자신에 대한 수배가 해제된 것으로 판단하고, 4월에 경찰에 자수한다. 박우섭은 예상대로 간단한 조사만 받고 풀려났다. 대신 구월동 수배자 방은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됐고, 나머지 사람들은 연고를 찾아 떠났다. 그러나 구월동 그룹 사람들은 공개투쟁단체가 필요하다는 강한 확신과 의지를 품고 있었고, 언젠가 그 단체가 출범하면 그 단체에서 자기도 뭔가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간직하고 있었다. 박우섭이 자수하여 수배를 푼 것도 그것이 앞으로의 공개단체 활동을 위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민청협 그룹또 한 갈래 공개적 청년운동 건설 논의가 태동한 곳은 민청협 그룹이었다. 나중에 이들을 OB그룹이라고 불렀다.
민청협은 민청학련사건 관련자들이 중심이 되어 1978년 5월에 출범한 단체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청년들 67명이 그해 1월 민청학련 사건으로 아직 풀려나지 못한 이강철, 유인태 등 6명의 석방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그중 일부의 사람들이 유신체제 아래에서의 이른바 요시찰 인물들에 대한 탄압에 대해 공동대처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으로 민청협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초대 회장은 정문화가 맡았다. 이후 2대 회장은 조성우(고려대 68학번)가 이어받았는데, 1979년 명칭을 '민주청년협의회'로 바꾸고, 상설적인 민주화투쟁 단체를 표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