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항쟁 이후 전국에 배포된 수배자 벽보 중 민청련 관련자들. 왼쪽부터 문국주, 심재권, 이명준, 박우섭, 소준섭, 박계동.
민청련동지회
같은 구월동 주공아파트 단지 안에 김근태가 살고 있었다. 당시 김근태는 수배상태에서 부인 인재근과 혼례를 올리지 않은 상태로 동거하면서 인천 도시산업선교회에서 비공식 실무자로 일할 때였다. 수배자 중 제일 나이가 어렸던 소준섭은 신동수의 소개로 김근태의 집에서 살다가 구월동 아파트 수배자들과 합류하였다. 신동수는 김근태의 경기고 동기동창이면서 오랜 민주화운동 동지였다. 그리고 주공아파트 단지 옆 한신아파트 단지에는 이명준(중앙대 68학번)이 살았고, 여기에는 또 수배상태의 심재권(서울대 66학번, 현 국회의원), 박계동(고려대 71학번)이 드나들었다.
김근태를 포함한 구월동 일곱 사람은 자주 만나 어울려 놀았고, 밤새 열띤 토론도 벌였다. 때로는 옆 단지의 이명준과 박계동이 함께 어울렸다. 이들은 틈나는 대로 정세를 논하고 군부독재에 맞서 저항운동을 조직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하여 논의했다. 생활비는 각자 아르바이트 등을 해서 조금씩 보탰다. 출판사를 운영하는 선배로부터 번역 일거리를 맡아서 하기도 하고, 풀무원의 무공해 두부와 콩나물 배달 일도 했다.
당시 원혜영(서울대 71학번, 현 국회의원)이 무공해 식품을 공급하는 풀무원이라는 회사를 막 창립하였는데 신동수가 이 회사에 관여하면서 도망자들의 일거리를 물어왔다. 수배자들은 모두 가난했지만 내 것 네 것 없이 공동체 생활을 했다.
1981년 말에 이곳에 드나들던 박계동이 마산에서 밀항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는데 그 여파로 구월동 수배자들도 몇 주간 다른 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해프닝이 있었다.
1982년 3월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나고, 범인을 추적하던 경찰이 수배자의 소행으로 판단하고 수배자 9명을 공개 수배했다. 이때 박계동, 박우섭, 문국주, 소준섭의 얼굴이 한동안 TV 화면에 대문짝만하게 공개됐다. 결국 이때 강화된 경찰의 추적으로 박계동, 문국주는 체포되었다. 박계동은 마을 반상회에서 수배자의 얼굴을 확인한 집주인의 신고로 검거됐다. 그리고 비슷한 때 문국주도 신호등을 보지 않고 무심코 길을 건너다 어이없게도 교통경찰의 단속에 걸려 체포됐다.
그러나 이런 우여곡절 속에서도 구월동 아파트 합숙생활은 1983년 초까지 계속되었다. 비록 불안정하고 어둡던 시절이었지만, 모두들 미래를 낙관하였고 뜨거운 투지와 사명감에 불타 있었다. 휴일에는 근처 공원에서 농구도 했다. 나중에 김근태는 이 농구가 김근태와 구월동 식구들의 연대감을 높여주었고 이런 유대감이 나중에 민청련 창립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술회했다. 농구는 날렵한 김근태와 키가 큰 이범영이 잘했고, 박우섭은 몸은 날쌨지만 골 넣는 실력은 젬병이었다.
박우섭은 골은 잘 못 넣었지만 연애는 잘했다. 수배생활 중에도 대학 연극반 때부터 닦은 탈춤을 반도상사 노동조합 노동자들에게 가르쳤는데, 제자 중에서 눈망울이 초롱하고 수더분한 여성조합원 이미영이 마음에 들었다. 둘은 몰래 사귀기 시작했고, 급속히 가까워졌다. 박우섭은 1982년 어느 날 이미영을 구월동으로 데려와 방 두 개 중 한 개를 차지하고 동거를 시작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나머지 방 한 개로 밀려났다. 이 수배자들과 생활하는 속에서 부인 이미영은 1983년 1월에 첫 아이 기모를 출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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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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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도망자'들은 왜 인천 구월동에서 모여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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