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왕(정보석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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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충렬왕의 사냥 여행은 불발로 끝났다. 몽골 출신 장목왕후가 갑자기 아프다며 자리에 누웠기 때문이다. 장목왕후가 몽골에서 받은 작위는 제국대장공주다. 장(長)공주는 황제의 누나나 여동생, 대장(大長)공주는 황제의 고모였다. 제국대장공주란 칭호를 받을 당시에 황제의 고모였기에, 대장공주란 타이틀이 들어간 것이다.
바로 이 제국대장공주가 눕자, 충렬왕은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몽골의 간섭을 받는 처지라, 몽골 출신 왕비를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고려 백성들의 생업은 무시하면서도 몽골 출신 왕비의 건강은 무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홉 살짜리 세자의 비판을 받고도 충렬왕이 여행을 강행하자 제국대장공주가 자리에 눕고, 결국 그 때문에 충렬왕의 여행이 취소된 것을 보면, 세자가 어머니 제국대장공주의 눈치를 살핀 뒤에 충렬왕한테 충고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어머니를 의식해 아버지의 여행을 비판했을 수도 있지만, 세자 왕원은 표면상으로는 민간경제가 어렵다는 점과 농사철이 임박했다는 점을 명분으로 아버지를 비판했다. 아버지의 행동이 백성들의 눈에 좋지 않게 비칠 거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충렬왕 부자의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옛날 사람들은 '나랏일을 하는 사람은 재난이 발생한 직후는 물론이고 그 직전에도 항상 백성을 염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장마가 발생한 직후는 물론이고, 장마철이나 농사철이 임박한 시점에도 미리미리 백성들을 염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어린 왕원이 아버지를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들 약점 잡아 정치적 곤경에 몰아넣으려 한 아버지그런데 그 부자의 갈등은 그 후로도 끊임없이 벌어졌다. <왕은 사랑한다> 1회·2회 방영분에서도 그런 관계가 묘사됐다. 드라마 속의 충렬왕은 세자 왕원이 몽골 피를 물려받았다는 점을 불만스러워 했다. 그래서 아들의 약점을 잡아 정치적 곤경에 몰아넣으려 했다.
세자 왕원은 아버지보다 정치적으로 유리했다. 몽골의 간섭을 받는 시절이기 때문에 '누가 더 뼛속 깊이 친몽골이냐'가 권력투쟁의 변수로 작용했다. 충렬왕은 몽골 여성을 왕비로 두었을 뿐이지만, 아들 왕원은 몽골 여성을 어머니로 둔 상태에서 몽골 여성을 아내로 두기까지 했다. 그래서 왕원의 존재는 아버지 충렬왕에게 위협이 되었다.
이로 인해 충렬왕 부자는 권력투쟁을 벌였고, 서로 한 번씩 왕위를 뺏고 빼앗았다. 1298년에는 스물네 살의 왕원이 충렬왕의 왕위를 빼앗았다. 하지만 7개월 만에 충렬왕이 '타이틀'을 탈환했다. 그 뒤 10년간은 충렬왕이 왕위를 지켰고, 1308년 충렬왕의 죽음과 함께 왕원이 다시 왕이 됐다.
두 부자가 왕위를 뺏고 빼앗기는 바람에, 이 시기의 고려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난점이 생긴다. 충렬왕이 제25대 주상이고 충선왕이 제26대 주상이지만, 충선왕이 주상이 된 뒤 충렬왕이 다시 주상이 됐기 때문에 두 사람의 재위 기간을 외우기가 무척 복잡하다.
충렬왕의 재위 기간은 '1274~1298년 및 1298~1308년'이고 충선왕의 재위 기간은 '1298년 및 1308~1313년'이다. 이렇게 재위 기간에서부터 역사 독자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이들의 부자관계가 드라마 <왕은 사랑한다>에서 어떻게 묘사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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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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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철에 여행 가려다 아홉 살 아들에게 혼난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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