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의 왕비>.
KBS
KBS 드라마 <7일의 왕비>는 실제 역사와 무관하게 전개되고 있지만, 사실과 가까운 면도 있다. 그것은 불리한 현실을 인식하고 몸을 낮추면서도 결정적 한 방을 노리는 중종 임금(연우진 분)의 성격이다.
드라마에서는 중종이 이복형 연산군(이동건 분)을 몰아내고자 그런 기질을 발휘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하지만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것은, 왕이 된 다음에 보수파 정권을 무너뜨리고자 그런 기질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이런 특성을 기반으로 중종은 16세기 판 검찰 개혁을 성사시키고 보수파 정권을 약화시켰다. 이로써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에는 임금이 허수아비라서 임금과 정권이 분리되어 있었다. 그래서 임금이 보수파 정권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
중종은 아무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1506년에 박원종·성희안·유순정이 이끄는 반군의 추대로 임금 자리에 올랐다. 열아홉 살이었던 그는 반군의 추대로 왕이 되는 바람에 일생일대의 치욕을 겪었다.
정권을 잡은 반군은 중종의 부인인 신씨가 연산군의 처조카라는 점, 연산군 정권 실세인 신수근의 딸이라는 점을 문제 삼았다. 그래서 쿠데타 7일 뒤에 신씨와 중종을 강제로 이혼시켰다. 그런 뒤에 중종은 장경왕후 윤씨를 새로운 왕비로 맞이했다.
중종은 훈구파라 불리는 쿠데타 주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허수아비 삶을 살았다. 조선 후기 김시양의 수필집인 <부계기문>에 따르면, 중종은 박원종·성희안·유순정이 자신과 함께 있다가 돌아갈 때면 언제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고 한다. 세 사람이 문을 열고 나간 다음에야 자리에 앉았다고 한다.
그 정도로 힘이 없었지만, 실세 임금이 되겠다는 꿈은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훈구파가 워낙 강했으므로 그 꿈을 가슴 한 켠에 숨겨두고 때만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 세월이 흐르고 쿠데타 주역들이 죽어갔다. 쿠데타 4년 뒤인 1510년 박원종이 죽고, 1512년 유순정이 죽고, 1513년 성희안이 죽었다. 3거두의 죽음으로 쿠데타 세력이 점차 약해지던 상황에서 1515년에는 장경왕후도 눈을 감았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야당 혹은 재야 진보세력인 사림파(유림파)가 행동에 나섰다. 이참에 훈구파를 약화시킬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중종도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사림파가 훈구파를 공격하는 상황을 이용해, 중종은 16세기 판 검찰 개혁을 벌이고 이를 통해 구세력의 기반을 흔들어놓았다.
사림파는 중전 자리가 비었다는 명분으로 신씨와 중종의 재결합을 추진했다. 훈구파가 이혼시켜 놓은 신씨를 중전 자리에 앉힘으로써 훈구파의 입지를 축소시킬 생각이었던 것이다. 총대를 메고 이런 목소리를 대변한 이들이 있었다. 전라도 담양부사 박상과 순창군수 김정이었다. 이들은 신씨를 중전 자리에 앉히라고 상소를 올렸다.
이런 상소는 쿠데타 세력의 집권 명분을 간접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쿠데타 주역들이 몰아낸 신씨를 도로 불러들이자는 것은, 그 주역들을 정계에서 내보내자는 말과 같았다. 이런 상소를 현직 지방관들이 올렸던 것이다.
그런데 훈구파 조정 대신들은 외형상으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상소가 신경 쓰이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신경은 쓰였지만, 믿을 만한 구석이 있었다. 중종이 전처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쉽사리 재결합하지 못할 거란 기대감이었다. 연산군과 함께 신씨가 쫓겨나지 않았다면, 중종은 왕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런 중종이 왕위를 포기하고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재결합을 추진하진 않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또 박상·김정의 상소는 명분을 갖고 있었다. 임금에게 조강지처와 재결합하라는 상소였다. 이런 충성스러운 상소를 대놓고 비판하기도 힘들었다. 이런 이유로 보수파가 가만히 있었건만, 눈치도 없이 분위기를 깨고 박상·김정을 공격한 이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대사간 이행이었다. 대사간은 국정 비판을 담당하는 사간원의 장이었다. 이행은 대사헌 권민수를 동조자로 만들었다. 대사헌은 사헌부의 장이다. 사헌부는 법규 위반자를 찾아내고 공직자의 비행을 조사했다. 또 기소권(형사소송 신청권)과 구형권(형벌 요청권)도 있었다. 그래서 검찰청에 상응했다. 그런 대사헌의 장이 사간원의 장과 합세해 공격에 착수했다. 박상·김정을 처벌하고 유배 보낸 것이다.
지방 출신의 개혁적 선비 그룹인 사림파는 연산군의 아버지 때인 성종시대(1469~1494년)에 중앙정계에 집중적으로 진출했다. 이들이 장악한 관청은 주로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이다. 홍문관은 군주의 자문에 응하는 관청이었다.
사림파가 세 관청에 주로 진출한 것은, 직무의 성격상 학문적 능력이 필요한 곳들이었기 때문이다. 세 관청은 3사(司)로 묶여서 불렸다. 짝꿍 기관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보수세력 훈구파는 행정 관청인 이·호·예·병·형·공의 6조를 장악했다.
성종시대부터 검찰청인 사헌부가 사림파한테 장악됐지만, 검찰권이 사림파에 의해 남용되지는 않았다. 보수파가 6조를 쥐고 있어 정치적 균형이 이루어진 덕분이다. 그런데 연산군 시대(1494~1506년)의 공안정국으로 사림파가 대거 죽임을 당한 데 이어, 훈구파가 연산군을 몰아내는 쿠데타를 주도함에 따라 사헌부는 확실하게 보수파에 의해 장악됐다. 사헌부가 보수파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게 된 것이다. 명분이 약한 박상·김정 처벌 작업에 사헌부가 참여한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검찰 개혁에 관한 전문가 대담집인 최강욱 변호사의 <권력과 검찰> 제1장에서 한겨레 신문 김의겸 기자는 "강기훈 사건의 경우 국정원이나 경찰이 손도 안 댔는데, 검찰이 먼저 노태우 정부를 보호하기 위해 사건을 주도적으로 만들어간 거죠"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다른 권력기관들이 손도 안 대고 있는데 사헌부가 사간원과 함께 훈구파 정권을 보호하고자 박상·김정 사건을 의도적으로 만들어간 것이다. 임금과 조강지처의 재결합을 촉구하는 상소라서 어찌 보면 문제될 것도 없는 일을 중대 시국사건으로 '만들어' 간 것이다.
이처럼 1515년의 조선 검찰이 권력의 시녀 노릇을 자처하는 상황에서 뜻밖의 인물이 불쑥 등장했다. 과거시험 2단계인 대과에 급제한 지 석 달밖에 안 된 34세의 신진 관료 조광조였다. 조선시대의 가장 유명한 개혁가 중 하나인 조광조가 바로 이때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