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반구대 암각화 3D 계측
국립문화재연구소
이 별에 온 것들은 모두 흔적을 남긴다. 사람이 기록하지 못하면 바람과 돌, 물이 대신 기록한다. 흔적은 스스로 퇴적하여 역사가 되고, 그렇게 퇴적된 역사는 유산이 된다. 우리 주변의 무수한 자연유산, 문화유산 등은 오래 전 흔적이 보내는 일종의 타전이다. 표피만 보고 취하지 마라는, 겉멋에 취해 심층을 포기하지 마라는.
흑산도와 고래의 연관성을 알아보기 위해 옛 기록을 살펴보기로 했다.
우리나라에서 고래와 관련한 최초의 기록물은 울산 반구대 암각화(岩刻畫)다. 반구대 암각화 제작연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7000년 ~ 3500년 전인 신석기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연구자들은 반구대 암각화에 등장하는 몇몇 고래의 종류를 특정하기도 했다. 형태상으로 봤을 때 반구대 암각화에 등장하는 고래는 북방긴수염고래, 혹등고래, 귀신고래와 범고래, 참돌고래로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반구대 암각화에는 고래를 잡는 배와 고래를 쏠 때 쓰는 도구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포경(捕鯨) 관련 기록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를 근거로 몇몇 연구자들은 우리 민족이 상고대(上古代)부터 포경을 이어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반구대 암각화 기록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여러 옛 문헌에는 고래잡이와 관련한 이렇다 할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우선 <삼국사기>나 <조선왕조실록> 등 옛 문헌에는 고래 관련 기록 자체가 그리 많지 않다. <삼국사기>에서 고래가 처음으로 등장한 때는 고구려 민중왕(閔中王) 4년(서기 47년)이다.
"동해인(東海人) 고주리(高朱利)가 고래눈을 왕에게 바쳤는데 밤에도 빛이 났다." 왕에게 바칠 정도로 매우 귀한 선물로 고래눈이었던 것이다. 서기 288년에도 고래눈을 왕에게 바친 기록이 나온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서천왕에게 "해곡(海谷)의 태수가 고래의 눈을 바쳤다"면서 "그 눈알은 밤이 되면 밝은 빛을 발한다"라고 했다.
조선시대에도 고래는 귀한 선물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세종실록> 1419년 음력 8월 22일(세종 1년) 자는 "상왕이 내시 최한을 보내어, 황엄에게 흰 숫돌과 고래수염을 선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재밌는 것은 폭군의 기행을 빗댄 사례에 고래가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연산군일기>에서다.
연산군 즉위 5년이었던 1499년 9월 2일(음력) 연산군은 "흰 고래수염을 대궐에 들이게" 했다. 세종대왕도 신하들에게 고래수염을 선물로 내린 적 있으니 그럴 수 있다. 이듬해인 1500년 3월 11일(음력)에 연산군은 "경기 감사에게 돌고래·바다·자라 등을 산 채로 잡아 올리게 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급기야 연산군은 1505년 8월 19일(음력) 전라도의 바다에 면한 고을들에 명하여 고래를 사로잡아 오라고 명한다. 산 고래를 잡아 진상하지 못하자 연산군은 "부안 현감 원근례는 잔약해서 잘 보살피지 못했다"며 그를 파직한다. 고래를 잡을 수 있는데 못 잡았다면 무능하다는 이유로 파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은 고래잡이를 하는 포경국가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