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의 한 원룸에서 인터넷 수리 기사에게 흉기를 휘둘러 숨지게 한 혐의(살인)를 받는 고객 A(55)씨가 18일 오전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청주지방법원 충주지원에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6월 16일 충북 충주에서 50대 남성이 자신의 원룸에서 인터넷 수리 기사를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노모와 아내, 대학생 두 자녀를 둔 인터넷 수리기사는 통신 대기업에서 명예퇴직한 후 하청회사에 다시 채용돼 인터넷 설치·수리 업무를 해 왔다.
인터넷 기사를 살해한 남성은 경찰 조사에서 "인터넷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오래전부터 해당 업체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집에 찾아온 인터넷 수리 기사의 태도도 문제가 있어 화가 났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앞선 6월 8일 경남 양산 15층 아파트에서 40대 남성이 스마트폰 음악소리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13층 외벽 작업자의 생명 밧줄을 커터 칼로 절단해 숨지게 했다. 언론에 따르면 다섯 남매의 아빠인 작업자는 2~3년 전부터 부산의 한 건설업체 하청을 받아 건물 외벽 도색 업무를 했다.
경찰은 작업자의 생명 밧줄을 끊어 살해한 남성에 대해 "일용직 노동자로 일해 왔는데 사건이 발생한 날 새벽 인력사무소에 나갔으나 일거리를 찾지 못하고 돌아왔고, 술을 마신 것으로 파악됐다"고 전했다.
언론은 '분노 조절 장애형 범죄', '욱 하는 범죄', '묻지마 살인'이라는 기사를 연이어 쏟아낸다. '2015년 경찰청 통계 연보'에 따르면 2015년 발생한 폭력 범죄 중 15%가 현실 불만과 우발적인 동기로 발생했다. 극심한 경쟁, 실업, 양극화, 불평등이라는 현실 불만이 범죄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강자에겐 비굴하고 약자에겐 포악한연일 이어지는 안타까운 사연을 보며 지난겨울 광화문 광장의 기억이 떠올랐다. '박근혜 퇴진 광화문 캠핑촌'이라는 이름으로 텐트 농성을 하던 중이었다. 촛불집회가 끝나고 얼큰하게 취한 아저씨가 광화문 광장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술을 마셨다. 광장을 돌아다니며 행패를 부렸다.
광화문 광장은 금연 구역이고, 화재 위험이 있다고 얘기하자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퍼부었다. 여성들에게는 폭력을 휘두르려고 했다. 자신도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데 '니들이 뭔데 그러느냐'며 울분을 터뜨렸다. 통제가 불가능했다.
경찰을 부르겠다고 하자, 마음대로 하라며 기세등등했다. 경찰이 나타나자 그는 마치 고양이 앞의 쥐처럼 얌전해졌다. 자신은 잘못이 없다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만취해서 기억을 못 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속상했다. 촛불집회가 열렸던 5개월 동안 강자 앞에서는 비굴하고, 약자에게는 포악한 '개저씨'들을 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2016년 11월 19일이었다. 박근혜 퇴진 4차 촛불집회를 앞둔 광화문 네거리, 종로구청 단속반원들이 귤을 팔던 노점상의 좌판을 걷어찼다. 귤이 길거리로 나뒹굴자 노점상은 달려가 품에 주워 담았다. 노점상과 주변의 시민들이 항의하자, 단속반원들은 경찰을 불렀고, 경찰은 노점상을 끌고 갔다.
강자에겐 비굴하고, 약자에겐 포악한 경찰과 공무원의 모습을 다큐멘터리 사진가 노순택은 "잘라라 약자에게만 가혹한 그 손을"이라는 화보로 만들었다. 어디 경찰뿐이었던가.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에서 우리는 권력 앞에선 한없이 비굴하고, 국민에겐 더없이 가혹했던 정치, 검찰, 언론의 민낯을 똑똑히 보았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20년, 대한민국은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했다. 공동체와 연대의식이 있어야 할 자리를 돈과 힘의 논리가 차지했다. 권력자의 '갑질'을 보고배운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보다 힘없는 이들에게 '갑질'을 일삼았다. 여성과 청소년, 이주노동자가 그 제물이었다.
경남 양산의 일용직 노동자. 그의 분노는 어디로 향해야 했을까? 촛불집회로 세상을 바꾸었지만 날품팔이 가난한 노동은 바뀌지 않는 현실의 울분을 어디로 쏟아내야 했을까? 일자리를 만들고 사회복지를 책임져야 할 정부와 정치가 그 대상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원룸에 사는 실업자(?). 그의 분노는 어디로 향해야 했을까? 대기업 통신 회사의 도급을 받아 일하는 가난한 하청기사가 아니라 대기업이 될 수는 없었을까? 텔레비전만 켜면 '초고속 기가' 인터넷 상품 광고가 넘쳐나는 세상, 과장 광고와 다른 느린 인터넷의 책임을 공정거래위원회나 소비자보호원에 요구할 수는 없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