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죽음의 서>로 널리 알려진 파드마 삼바바가 악귀를 물리치기 위해 머물렀다는 리왈샤의 호수가에서 기도를 올리는 순례객.
송성영
파드마 삼바바의 수행 동굴을 다녀온 날 저녁, 갑자기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더니 사방팔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천둥소리와 함께 마른번개가 내리치기 시작했다. 일이초 간격, 아니 동시다발적으로 무시무시한 천둥소리와 함께 번쩍번쩍 번개가 내리꽂혔다. 평생 이런 천둥번개는 처음이었다. 사진기를 꺼냈지만 도저히 밖으로 나와 사진기를 들이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진기가 박살 날 것만 같았다.
북인도 코사니에서 잠시 잠깐 경험했던, 엄청난 기세로 내리쳤던 천둥번개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단번에 내 두개골을 쪼개버리고 대지를 두 동강 낼 기세로 내리꽂혔다. 공포 그 자체였다. 우주가 탄생되는 순간도 이러했을까 싶을 정도로 천둥과 번개가 사방천지를 뒤흔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 공포감이 20~30분 정도에 불과했지만 나는 창문을 열어놓지도 못하고 천둥번개가 치는 내내 딱딱한 침대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살아오면서 이처럼 두려움과 공포에 떨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날 밤 꿈을 꾸었다. 현실처럼 생생한 악몽을 꾸었다. 꿈속에서 악마의 화신처럼 집요하게 나를 괴롭히는 그녀에게서 도망쳤다. 어느 순간 나는 악귀처럼 돌아서 그녀를 뒤쫓아 가고 있었다. 내 손에는 도끼가 들려 있었다. 그 도끼로 그녀를 낚아채 내리쳤다.
그녀의 얼굴이 다른 사람의 얼굴로 바뀌었다. 그녀는 착하디착한 내 사랑하는 여동생의 얼굴이었다. 나는 여동생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리고는 꿈에서 깨어났다. 꿈에서 깨어났음에도 그 악몽이 너무나 생생해 숨을 헐떡거리며 꺼이꺼이 울음을 터뜨렸다.
길 잃은 아이처럼 지칠 때까지 울음을 터뜨린 나는 정좌하고 앉아 내 자신을 바로 보았다. 내가 벗어나려 했던, 내가 증오하고 분노했던 그녀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면서 또한 바로 내 자신이기도 했다.
모든 고통은 조건에서 생겨난다. 두 개의 얼굴, 분노의 대상과 사랑의 대상은 본래 없거나 하나인 것이다.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은 내 자신을 증오하는 것이나 나름 없다. 그 분노와 증오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 아닌 분노하고 있는 내 자신부터 죽여야 했다.
분노의 화신은 굶주린 맹수나 다름없다.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다. 걸신처럼 제 몸까지 먹어 치우려 한다. 꿈속에서 나는 그 걸신과 같았다. 지옥 같은 악몽이었다. 그 악몽은 단지 꿈이 아니었다. 분노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이기도 했다.
불현듯 무시무시한 천둥번개와 함께 그 어떤 보이지 않는 존재가 악몽을 통해 나를 일깨워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금강경(불교의 경전. 반야심경과 더불어 가장 잘 알려진 대승 불교 경전들 가운데 하나)을 떠올렸다.
붓다는 금강경에서 '위없이 올바른 깨달음으로 향하는 마음'을 내기 위해서는 겉모습이나 현상, 관념의 덧없음을 알라 했다. 이들에 현혹되지 않고 올바르게 관찰해 깨달음을 향하는 순수한 마음을 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금강'은 산스크리트어 와즈라체디까(Vajracchedikā)를 뜻으로 풀어 해석한 것이다. 여기서 '와즈라(Vajra : 인도 베다 경전의 신들 중에 으뜸인 천둥번개의 신, 인드라의 번개)는 강력한 힘으로 절단하거나 깨부수는 것'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하여 '금강경'은 마음속의 분별, 집착, 번뇌 등을 부숴버려 깨달음으로 이끄는 강력한 지혜의 경전, 벼락처럼 무지를 깨쳐 주는 '벼락경'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날 밤 내가 경험했던 무시무시한 천둥 번개는 내 안의 집착과 번뇌를 부숴 버리는 인드라의 '와즈라'와 같은 것이었다.
진흙바닥에서 수십 년 묻혀 있는 연꽃 씨가 적당한 환경이 조성되면 발아하여 꽃을 피우듯이 악한 기운 또한 마찬가지다. 분노의 기운 또한 마찬가지다. 잠시 잊고 있거나 덮어 놓고 있을 뿐이다. 내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그 분노의 불씨를 없애야 한다. 그날 밤 천둥번개를 동반한 악몽은 내 안에 숨겨져 있는 분노의 불씨, 악업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던 것이다.
나는 어느 순간 업장소멸을 위한 관세음보살의 진언인 '옴마니 반메훔'을 무심결에 읊조리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내가 옴마니 반메훔을 웅얼거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만트라 따위와는 상관없이 모든 게 마음에 달려 있다고 믿고 있었다.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모든 것을 찾겠노라 자만했다. 하지만 내 안에서 미신처럼 여겼던 만트라, 옴마니 반메훔이 저절로 터져 나왔고 그렇게 밤새 '옴마니 반메훔'을 읊조리다가 새날이 밝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