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행복한 놀이터>
오마이북
어린 날의 공터가 떠오른 것은 책 <엄마도 행복한 놀이터>(글 이소영, 사진 이유진, 오마이북 펴냄)를 읽고서다. 이 책은 아이 셋, 어른 다섯으로 이뤄진 한 가족이 생태도시인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한 달 동안 머물며 놀이터를 찾아다닌 이야기를 담았다.
독일까지 가서 놀이터만 보고 왔다는 것이 희한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책에 나온 놀이터들은 흔히 떠올리는 그것과 사뭇 다르다. 저자가 가장 먼저 소개한 곳은 프라이부르크의 1000년 된 물길 베힐레.
강에서 끌어온 폭 30cm, 총 길이 15km에 이르는 얕은 물길이 도심 곳곳에 흐른다. 엄밀히 말해 놀이터는 아니지만 일단 물속에 발을 들여놓은 아이들은 이때부터 옷이 젖는 줄도,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다. 서로 물을 튕기고 물을 손으로 휘젓고 신발을 띄운다. 아이들에겐 최고의 놀이터다.
"이상하게도 물을 따라 걸으면 쉽게 지치지 않는다. 등산길이 아무리 험해도 계곡물에 발 한번 담그면 이겨낼 수 있지 않던가. 베힐레에 들어가 노는 아이들을 보는 부모의 마음 역시 한결 가볍다. 온몸을 흠뻑 적시지 않고도 꽤나 오래 놀고, 땡볕에 걷게 했다면 지쳐서 "안아줘" "힘들어!"를 외칠 시간이 벌써 지났을 텐데 끄떡없다. 물에서 나오란 소리만 하지 않으면 부모와 아이 모두 평화롭다. 아이는 제 몸에 맞춘 듯한 귀여운 물길 속 놀이에 푹 빠져 있다." (28쪽) 호수공원 제파크는 또 어떤가. 제파크의 호수는 우리나라 공원의 여느 호수처럼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곳이 아니다. 이곳엔 '수영금지' 푯말이 없다.
"공원 호수에는 벌거벗은 아이가 오리와 함께 헤엄치고 있었다. 수영장도 해수욕장도 아닌 호수에서, 방수 기저귀도 팬티도 없는 완벽한 알몸으로, 장난감 오리가 아닌 진짜 오리 10여 마리와 함께. 아이들은 발만 담근 게 아니라 물속에 쑤욱 들어가서 놀고 있었다." (48쪽)
안전요원도 없는 호수에 사람이 뛰어들도록 놔둬도 될까? 독일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과정에 수영 교육이 필수로 들어가고, 청소년 수영자격증을 받아야만 한단다. 게다가 많은 아이들이 인명구조법과 사고대처법을 익혀 더 높은 단계의 자격증을 딴다. 그래서일까. 독일의 수영장엔 튜브가 없다. '수영금지' 푯말을 따로 세우지 않는 것도 수영을 책임지고 가르친 독일 교육의 자신감인지 모른다.
한참을 걸어야 만날 수 있는 놀이터도 있다. 동물원 문덴호프는 동물-자연-체험공원이 어우러진 곳이다. 전체 면적 38만 제곱미터나 되는 드넓은 곳에 동물은 겨우 180여 마리. 그마저 울타리와 동물이 사는 곳이 너무 멀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이곳에서도 저자 일행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동물원 곳곳에 있는 놀이터다.
"프라이부르크의 놀이터가 다 그렇듯 이곳에도 색이 없다. 콘크리트는 콘크리트인 채, 나무는 나무인 채로 있다. 오래된 나무의 색은 흙을 닮아간다. 그러니 온통 칙칙하다. (중략) 그런 놀이터가 순식간에 표정을 바꾼다. 아이들이 한 명, 두 명 놀기 시작하면 돌변한다. 이 놀이터들은 그래서 하얀 스케치북 같다. 아이들이 연필이고 물감이다. 어떤 그림이 될지는 스케치북이 아니라 아이들이 정한다." (96쪽)저자에게 우리나라와 프라이부르크 놀이터는 겉모습부터 달랐다. 우선 우리나라 놀이터는 겉보기에 그럴싸해 사진발이 좋다. 하지만 막상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그리 신나게 놀지 않는다. 놀이시설의 간격이 너무 좁기 때문이다.
잘 만들었다는 국립생태원의 놀이터에서도 "벌집에 들어갔다가 개구리 미끄럼틀을 타고, 거미 모양 사다리에 올랐다가 정신없이 다음, 그 다음으로 옮겨 가"면 그만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놀이터란, "그네, 미끄럼틀, 시소가 한 세트로 완성되면 그뿐"인 곳이다. 그나마 아파트에 놀이시설이 몇 가지 갖춰져 있을 뿐 오래된 주택가에선 이마저도 찾기 힘들다.
반면, 프라이부르크의 놀이터는 일단 넓다. 저자는 이곳이 좁은 우리나라와 다르게 땅이 넓어서가 아니라 "공원과 놀이터가 삶에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제일 좋은 자리, 넓은 땅을 내어준 것일지 모른다"고 한다. 괜한 추측이 아니다. 프라이부르크 시는 놀이터 조성에 주민과 아이들이 직접 참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시 홈페이지에 시 전역의 놀이터 위치를 표시한 지도를 공개해놨을 정도다. 또 이곳의 놀이터는 인근의 자연 산물로만 만든다는 원칙이 있다. "자갈, 나무껍질, 바위, 목재 등 놀이터에 있는 시설들은 모두 자연물이다."(164쪽)놀이시설로 빽빽한 우리나라 놀이터에서 보호자들은 가장자리에 둘러선 채 아이들이 노는 것을 '매의 눈'으로 지켜볼 뿐이다. 하지만 이곳의 놀이터는 어른을 소외시키지 않는다. '모험 놀이터'인 룸펠하우젠에선 "웅덩이 파기, 모닥불 놀이, 나무 타기 등 대체로 '금지'된 놀이가 가능"하다.
"그게 진짜 놀이였다. 다 갖춰진 놀이터에서는 절대 얻지 못할 모험이 놀이터에 있다. 휴대전화를 보며 '시간아 가라' 주문을 욀 부모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부모도 아이와 함께 아이디어를 짜내고, 몸을 움직여야 놀이터가 완성될 테니. 아차, 완성이란 없다. 모험은 쭉 진행형이다."(184쪽)이 대목에서 난 데 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이상했다.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은 자주 다퉜다. 갑자기 가세가 기운 시절엔 더했다. 냉담하게 서로를 대하는 부모님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나는 날마다 공터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