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에서 성종 대까지 63년에 걸쳐 완공된 사연많은 돌다리.
김종성
조선을 건립한 태조 이성계는 동방예의지국의 왕답게 중화 격식에 맞춰 무려 삼십년간 궁궐과 종묘를 짓는 일에만 집중했다. 백성들을 위한 길도 닦지 않고 여름이면 장마로 홍수가 나는 하천에 둑도 제방도 쌓지 않았다. 세종 때야 만들기 시작한 이 다리도 처음엔 태종의 잦은 행차 때문에 만들기 시작했다. 1420년(세종 2년) 처음 짓기 시작한 살곶이 다리는 63년만인 1483년(성종 14년)에야 완공한다.
세종 즉위 후 태종은 광나루에서 매사냥을 즐겼는데, 강 건너 낙천정(樂天亭)과 풍양이궁(豊壤離宮)에 수시로 행차했다. 이때 강을 건너야 하는 수행 중신들의 고충이 심해지자, 태종은 다리공사를 명했다. 세종 2년(1420) 5월 태종은 영의정 유정현·박자청을 통해 돌다리 공사를 하게 했지만, 기술부족과 홍수 등으로 완공하지 못했다.
태종이 죽은 후 이곳을 통한 행차가 거의 없어지면서 다리는 짓다 말게 된다. 세종 3년부터 시작된 도성 안 개천·제방축조공사로 인해 도성 밖 이곳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길을 이용하는 백성들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마침내 성종 14년(1483년) 조선시대 가장 긴 다리가 완성된다.
조선 최고의 만물박사라 불리는 성현의 수필집 '용재총화'에는 다리가 평지를 밟는 것처럼 탄탄하다 하여 성종이 제반교(濟盤橋)라 명명하였다는 내력이 기록돼 있다. 제반교가 언제부터 살곶이 다리로 불렸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 고장 지명이 살곶이평(箭串坪)이라는 데서 온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 다리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동쪽의 광나루를 통해 나가면 강원도 강릉에 닿았고, 동남쪽으로는 송파에서 광주·이천을 거쳐 충주로 나갈 수 있었다. 남쪽으로는 성수동 한강변에 닿아 선정릉(성종과 중종의 능)과 헌인릉(태종과 순조의 능)으로 가는 왕의 배릉(拜陵)길이 되었다.
다리 이름이 된 '살곶이' 지명의 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