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8월 24일 세워진 백거이 1,220주년 기념비
이상옥
백거이는 초고를 쓰고는 글을 모르는 노파에게 먼저 들려주고, 그 노파가 알아들을 때까지 몇 번이고 고쳤다. 이백은 하늘이 내려준 시를 받아썼으니, 논외로 하고, 두보는 자신의 마음에 들 때까지 고치고 고치는 완벽주의자라면 백거이는 독자 중심주의 시인이라 할 만하다.
백거이가 섬서 주지현 현위(縣尉)로 있을 때 벗들과 선유사(仙遊寺)를 유람하면서 현종과 양귀비의 일을 상기하는 가운데 벗들이 현종과 양귀비에 관한 시를 쓰라는 요청에 결국 <장한가(長恨歌)>를 썼다.
백거이는 조회도 보지 않고 짧은 봄밤을 한탄하며 중천에 해가 떠서야 일어나는 황제를 비난하며 교태를 부리는 후궁 삼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양귀비를 풍자했다. 그의 붓 한 자루가 세상을 얼마나 바꿨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백거이는 시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려 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낙양의 용문석굴을 둘러보고 백거이 묘를 찾았다. 대 시인의 묘답게 규모가 컸다. 백거이는 장안에서 조정의 내직으로 일했으나 권세 타툼의 틈바구니에 회의를 느끼고 스스로 지방 관리를 자청하며 만년에는 벼슬을 버리고 낙양으로 은거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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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디카시연구소 대표로서 계간 '디카시'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고 있으며, 베트남 빈롱 소재 구룡대학교 외국인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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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 한 자루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중국 3대 시성 백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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