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 광장 캠핑촌에 텐트를 친 노동자들.
노숙택
"피청구인, 박근혜를 파면한다."서울광화문 광장에 이정미 헌법재판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박근혜퇴진 광화문캠핑촌(이하 캠핑촌) 촌민들은 함께 울고 함께 기뻐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넉 달 넘게 광장의 최전선을 지켜낸 승리였다.
캠핑촌 생활은 고통이었다. 한 겨울 노숙투쟁과 그에 버금가는 매연과 자동차 소음, 긴장의 연속인 촌민생활, 경찰의 퇴거 압박과 태극기 어르신들의 해코지 등 모든 것이 힘든 나날이었다. 하지만 처음엔 텐트 한 동 조차 힘들었던 상황이 이젠 텐트촌과 문화예술 광장으로 변모했다. 이게 다 촛불의 역동성이 만들어낸 결과다. 촛불이 광장을 열고 광장을 지켜낸 거다.
열린 광장의 빈 공간은 촛불시민이 채웠다. 여기에 풍자와 해학이 깃든 공연과 전시품들이 더해지면서 더 큰 분노와 실천이 만들어졌다. 시간이 갈수록 광장의 연대가 깊어지고 넓어진 이유다.
'광화문캠핑촌'에 입주하는 사람과 단체도 다양해지고 응원의 목소리도 커졌다. 이 과정에서 맺어진 연대는 문화와 노동이 융합하는 단계까지 진화해 함께 승리하는 연대를 만들어냈다. 그래서다. 캠핑촌 노숙투쟁 연대의 과정과 흐름을 되짚어 보며, 광장의 점거와 연대의 의미를 돌아본다.
광화문에 캠핑촌이 들어서다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이 수면위로 드러났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광화문광장을 주목하거나 촛불의 물결을 예상치 못했다. 억압과 감시, 좌절과 체념의 늪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1차 촛불집회때 울려 퍼진 분노의 함성은 잠자고 있던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을 깨우는 계기였다.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농선텐트는 투쟁의 거점과 광장점거운동의 중요한 상징이 됐다. 지난해 11월 4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린 뒤 광화문광장에 농성텐트가 차려졌다.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문하예술인들과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이하 비없세)를 비롯해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함께 준비하고 만들어 낸 결과다.
이명박근혜정권 10년 동안 가장 철저하게 핍박당하면서도 끈질기게 저항했던 블랙리스트 예술가와 블랙리스트 노동자들의 연대이기도 하다. 이들이 함께 손잡고 한 발 앞서 광장을 열면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선도적 행동이기도 하다.
촛불의 역동성이 캠핑촌과 광장을 지켜냈다. 궁지에 몰린 정권은 잔혹했다. 광장이 뚫려서는 안 된다는 위기감 때문인지 농성텐트를 무참히 짓밟았다. 하지만 힘겹게 지켜낸 농성텐트는 고립되고 비를 피하기 위한 비닐조차 덮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캠핑촌을 지켜내고 만든 힘은 무엇일까. 농성텐트 사수투쟁과 맞물려 열린 2, 3차 촛불집회의 규모와 역동성을 손꼽을 수 있다. 분노한 민중은 함성으로 광장을 채웠고, 촛불로 뒤덮었다. 그제야 더 이상 캠핑촌을 향한 침탈도 발생하지 않았다.
여기에 광화문 관리주체인 서울시의 암묵적인 인정도 캠핑촌을 지켜내는데 한몫 했다. 이를 계기로 한 두 동에 불과했던 농성텐트가 캠핑촌으로 발전하고 박근혜 퇴진 투쟁의 새로운 거점이 됐다. 무엇보다 광화문광장은 더 이상 고립된 섬이 아니라 촛불의 분노와 물결을 담아내는 너른 마당으로 변했다. 캠핑촌민들의 각오까지 더해져 가능했던 일이다.
공간이 확보되니 농성텐트가 물밑 듯이 밀려들었다. 박근혜 퇴진을 위한 광화문광장점거가 안전한 궤도에 오르자 다양한 단체와 개인들의 캠핑촌 입주가 이어졌다. 문화예술단체와 투쟁사업장을 비롯해 탈핵행진, GMO반대, 한겨레주주모임, 차나눔팀, 나눔발전, KT 1인 시위자, 촛불시민 등 각자의 색깔과 요구를 갖고 캠핑촌민이 됐다.
하지만 서울에서 가장 비싼 땅에 올린 집은 추위를 막아주지 못했다. 잠자리에 누우면, 바닥의 찬 기운이 그대로 온 몸에 전달됐다. 한 겨울 촌민생활이 녹녹치 않았던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도 캠핑촌을 유지하기 위해 촌민들은 각자 정해진 일을 하면서 각종 공연과 행사에 대한 준비, 참여, 뒷정리를 도맡았다.
촌민들의 열정이 광장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다양한 끼와 재능을 가진 문화예술인과 촛불시민들이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문화예술인들의 시국을 비판하는 마임, 춤, 미술행동, 풍물, 연극공연, 시국퍼포먼스 등이 공연됐다. 검열 없는 자유로운 표현에 광장이 뜨거워졌다.
촛불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이뤄진 길거리 붓글씨 써주기, 시민참여 '박근혜퇴진' 깃발제작 등이 운영됐다. 이게 다가 아니다. 촛불시민들은 음식과 차 나눔, 노숙농성에 필요한 물품 지원, 의료지원을 했다. 광화문광장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촛불광장으로 새롭게 태어난 거다.
광화문캠핑촌은 끊임없이 꿈틀거렸다. '박근혜퇴진과 시민정부 구성을 위한 예술행동위원회'는 촛불정국 내내 광장에서 시대의 요구에 응답하는 다양한 문화예술 공연을 선보였다. 각종 위원회도 구성해 자체 기획사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촛불시민들의 분노와 참여를 조직하고, 동시에 그들의 재능을 이끌어내면서 요구를 드러내기 위해서다.
그래서일까? 촛불집회가 끝나도 시민들의 발길은 광장을 떠나지 않았다. 박근혜퇴진 신나는 롹킹 문화난장 '하야하롹' 공연을 관람하고 촛불광장의 상징인 '희망촛불'에서 인증사진을 찍었다. 광화문미술행동의 촛불광장 프로젝트와 파견미술팀의 박근혜, 정몽구, 이재용, 김기춘, 조윤선, 황교안 조형물제작도 인기였다.
여기에 최병수 작가의 블랙리스트 제작 등 설치 작품 전시, 전국풍물연석회의의 도깨비 판굿 강강술래·새날맞이 굿 등 풍물공연, 민족춤협회의 북청사자탈춤 등 민족 춤 공연, 마임공연 등이 공연돼 촛불시민과 만나고 광장예술이 시민들과 지속적으로 호흡할 수 있었다. 궁핍현대미술광장은 개관전시 '내가 왜'를 시작으로 여섯 번의 전시를 통해 평일 낮 시간에도 시민들의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또한, 캠핑촌민들은 광장신문발행위원회, 광장토론위원회, 광장극장블랙텐트위원회 등을 구성해 문화공연과 작품 전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웠다. 신문발행위원회는 광장신문 1호, '박근혜 하야발표'라는 가상기사를 시작으로 4호까지 발행했으며, 토론위원회는 무려 열 두 차례 광장토론회를 개최했다. 블랙텐트위원회는 400여명의 예술가들이 참여해 연극공연을 중심으로 마임과 노래공연, 영화상영을 통해 캠핑촌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광장을 지켜낸 다양한 촛불행사와 힘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캠핑촌에는 노동자들도 텐트를 쳤다. 기륭전자분회를 중심으로 비없세 활동가들이 처음부터 촌민생활에 뛰어들었다. 이후 현대기아차비정규직노동자들이 결합해 박근혜-정몽구 구속과 비정규직철폐를 내걸고 익숙한 노숙농성에 돌입했다.
뒤이어 10년째 정리해고 노동자이자 문화예술인인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이 정리해고 철회와 원직복직, 예술 검열 반대 등을 요구하며 캠핑촌 지킴이 됐다. 이들은 투쟁과정에서 쌓인 문화예술인들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예술가와 노동자들의 가교역할도 도맡았다.
유성기업 해고노동자들도 결합했다. 이들은 노조파괴 진짜주범 정몽구·유시영 구속을 요구하며 투쟁한 끝에 유시영의 법정구속을 이끌어냈다. 투쟁만 한 것은 아니다. 매주 토요일마다 1년 가까이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있는 한광호 열사의 시민분향소를 설치, 운영했다. 이후에는 장례식과 1주기 추도식을 도맡기도 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은 조금 늦게 결합했지만 손배가압류철폐, 노란봉투법 제정, 해고자복직 등을 요구하며 매주 토요일 선전전을 진행했다. 파인텍지회(구, 스타케미칼)는 파업 중인데도 합의사항 이행을 요구하며 촌민생활을 결의했다.
이처럼 일곱 빛깔 투쟁을 하는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먼저 내세우기보다는 캠핑촌 촌민생활을 책임 있게 수행하면서 박근혜퇴진과 재벌총수 구속을 위한 투쟁에 앞장섰다. 이 과정에서 재벌총수의 앞잡이 이재용이 구속됐다.
블랙리스트와 블랙리스트가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