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적인 희생보다는 고통의 공동체가 낫다고. 부인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구축된 평화는 남편에게 지금 당장 편한 것일 뿐이다. 나 개인의 행복,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해서 가사 노동의 평등이 필요하다.
sxc
1980~1990년대에 태어난 우리는 남녀평등의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학교에서는 똑같이 성적으로 경쟁했으며, 꿈꾸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배웠다. 심지어 나는 어쭙잖게 페미니즘도 공부했다. 하지만 막상 결혼하고 나니, 지금까지의 생각을 비웃듯 내 몸은 다르게 반응했다. 퇴근하고 집에 오자마자 부엌으로 직행하는 사람은 나였다. 남편은 옷부터 갈아입고 쉬었다. 우리는 몸의 디폴트값부터 달랐다. 내 몸은 노동에, 그의 몸은 휴식에 우선순위를 부여했다. 그런 그를 설득해서 부엌으로 나오게 하는 것 자체가 내게는 이미 큰 스트레스였다.
집안일은 측정하기 어렵고, 보상이 없으며, 자발성에 크게 의존하는 노동이다. 그래서 이미 수동적인 자세를 취한 사람을 일하게 하기란 쉽지 않다. 첫째, 남편도 집안일을 일정 부분 수행하고 있으며(청소, 분리수거, 가계부 관리 등) 둘째, 추가로 집안일을 더 한다고 해서 돌아올 보상이 없다. 오히려 미숙함 때문에 잔소리를 들을 확률이 높고(오늘도 설거지하고 행주를 빨지 않았다!) 칭찬을 듣는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의 휴식과 맞바꿀 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이런 장애물에 부딪히지 않기 위해 가급적 부인은 '도움을 요청'하는 방식으로 말한다. 하지만 왕복 2시간 반이 걸려서 집에 도착한 나에게는 좋게 말할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앓느니 죽지' 하는 마음으로 차라리 내가 빨리 해치우는 게 낫다고 여겼다.
이 결정은 점점 큰 차이를 만들어냈다. 나는 요리를 할 줄 알아서 능숙해졌고, 능숙해져서 더 많이 하게 되는 악순환에 빠졌다. 남편도 볶음밥이나 고기 굽기 같은 기초적인 요리는 할 줄 알았지만, 대개 주 1회 이벤트에 그쳤다. 1년쯤 지나자 나는 가사 노동을 주도하고 남편은 보조하는 형태가 굳어졌다. 그렇게 내 안의 집요정은 점점 자라났다.
다른 맞벌이 친구들의 사정도 비슷했다. 애가 있든 없든, 벌이가 많든 적든, 여성은 남성보다 가사노동에 더 많은 시간을 쏟고 있었다. 우리는 점차 '표준치'에 가까워졌다. 여성은 하루 평균 가사 노동에 3시간 20분을, 남성은 40분을 쓴다는 통계청 수치는 참말이었다. 집들이는 평상시 가사 노동의 불평등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였다.
집에서 배운 '반쪽짜리' 평등왜 여성은 집에서 노동하는 몸을, 남성은 쉬는 몸을 갖게 되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는 대부분 엄마가 주 가사 노동자인 모델을 보고 자라왔다는 점이다. 딸과 아들에게 기대되는 역할이 다른 것도 한몫한다. 아들한테는 딱히 집안일을 장려하지는 않으면서 딸에게는 은연중에 '살림밑천'이 되기를 기대한다.
거칠게 말해서 첫째가 딸이라면 맏딸이니까 동생을 돌볼 것을 기대하고, 둘째가 딸이면 집안 서열의 끝이니까 시켜먹기 쉽다. 반면 첫째가 아들이라면 장손이라서, 둘째가 아들이면 막내라서 집안일에서 제외된다. 여기서 벗어나는 경우도 많겠지만, "시집가면 지겹도록 할 텐데 뭐하러 지금부터 하느냐"고 딸의 설거지를 말리는 엄마의 말에는, 아무리 시대가 달라져도 결국은 여성이 가사 노동을 하게 될 것이라는 숙명론적인 체념이 담겨 있다.
그래서 성인 남성과 남자아이는 대체로 집안일에서 제외돼 왔다. 통계청 발표에서 20대부터 50대까지 남성의 가사 노동 시간이 일관되게 적은 것은 이 때문이다. 이 공백은 주로 성인 여성 혼자서 메워왔다. 그것도 여의치 않을 때는 여아가 동원됐다. 예를 들어 내 경우에는 야근하는 엄마를 대신해 중학생 때부터 내가 할아버지부터 아빠, 오빠의 물심부름은 물론 상까지 차려 대령하곤 했다. 그것은 가부장제 속에서 차마 남자들과 집안일을 나누지 못한 엄마가, 집안에서 유일한 약자인 내게 가사 노동을 전가한 결과였다.
가사 분담의 혁명을 위하여... 이게 '남자들의 주요 전략'나는 혼자 집안일 하느라 골병들고 싶지 않다. 만만한 딸한테 집안일을 전가하기도 싫고, 아들을 자기 한 몸 돌보지 못하는 무능한 인간으로 만들기도 싫다. 그러려면 지금부터라도 남편하고 최대한 집안일을 나눠야 한다.
가사 노동의 불평등을 다룬 도서 <아내 가뭄>에서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인간은 대개 익숙한 것을 더 편하게 여긴다. 바로 그 때문에 지난 50년간 여성에게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데도 남성에게는 아연실색할 정도의 아주 작은 변화만 일어난 것이다." 익숙한 흐름에 몸을 맡기고 싶을 때, 그때가 바로 싸움을 시작해야 할 때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일단 남자들의 주요 전략부터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