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형식 장군』표지
눈빛출판사
나는 이런 사실을 1999년 여름 항일전적지 답사 도중 알게 된 뒤 16년간 내공을 쌓아 지난해 초겨울 <만주 제일의 항일 파르티잔 '허형식 장군'>"이라는 한 권의 실록소설로 세상에 내놓았다.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허형식 군장은 1909년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동에서 태어났다. 박정희 대통령이 태어난 상모동과 임은동은 공교롭게도 철길 하나 사이로 부르면 대답할 수 있는 지호지간이다.
허형식 군장은 1908년 경성감옥(서대문교도소) 개설 후 곧장 교수형으로 순국한 13도 창의군 군사장 왕산(旺山) 허위(許蔿)의 집안 조카였다.
1908년 허위의 순국으로 임은동 허씨들은 일제 등쌀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1915년 봄, 만주로 집단 망명했다.
그들은 길림성 통화현 다황거우, 진두허, 유하현 삼원포, 요녕성 개원현 이가태자 등지를 유리표박하다가 헤이룽장성 빈현 가판점으로 이주했다.
허형식은 거기서 더욱 투철한 항일전사가 되고자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당원으로 입당하여 군사부장 최용건(崔庸健)의 지도를 받았다.
1930년 5월 1일 허형식은 하얼빈 일본총영사관 습격을 주도, 심양감옥에 수감되어 그곳에서 조상지(趙尙志)와 평생 동지 김책(金策)을 만났다. 이들 셋은 삼국지 도원결의(桃園結義)처럼 혈맹을 맺은 뒤 각자 항일전사로 용맹을 크게 떨쳤다.
나는 허형식 군장이 33세 젊은 나이로 위만군과 교전 중 불꽃처럼 산화한 그 희생에 크게 감복하여 1999년부터 내 글방 서가에 그분의 사진을 걸어두고 내내 내공을 쌓은 끝에 이번에 한 권의 실록소설로 그분을 세상에 부활시켰다.
솔직히 해방 후 지금까지 우리 백성들은 줄곧 오만 잡스러움과 가짜들의 추악한 행태로 매우 지치고, 정의와 양심에 허기져 있다.
나는 이 작품에서 조선의 무명옷처럼 순결한 한 항일 파르티잔의 올곧은 생애를 오롯이 그려 보았다. <만주 제일의 항일 파르티잔 허형식 장군>이 그동안 가짜들에게 지치고 정의에 허기진 백성들에게 한 줄기 빛으로, 한 모금 생명수로 앞날에 대한 '희망'을 주고 삶의 활력소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 추운 겨울밤 나라와 겨레를 구원하려다가 불꽃처럼 산화한 정의와 양심의 투사 <동북 제일의 항일 파르티잔 허형식 장군>을 읽자. 그리하여 흐려진 우리 마음속의 양심과 정의감을 거울처럼 닦고 또 닦자.
마치 윤동주의 '참회록'에서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처럼.
그리하여 이 땅에 다시는 사이비 애국자들이 감히 범접치 못하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