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동리
이수지
햇살 가득한 창가에 앉아, 싸구려 인스턴트 햄버거와 과자 부스러기를 우울하게 씹었다. 힘없는 두 눈은 매점 안에 제멋대로 풀어뒀다. 젊은 남자 두 명이 서성대고 있었다. 하나는 계산대 앞에 서 있는, 우리에게 팔 수 있는 게 고작 햄버거뿐이라고 말한 그 남자다. 다른 한 명은 선 채로 TV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그림 나온다. 사장 할머니 아들들이다.
8년 전 미국에 가지 않았다면, 더스틴을 만나지 않았다면, 만나는 과정에서 뭔가 잘못되었더라면. 어떤 작은 우연이라도 들어맞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나도 지금 이 시각, 저 세 며느리처럼 어느 지방 소도시에서 전을 뒤집고 있었을지 모른다. 전을 부치고, 산적을 구워내고, 나물을 무치고, 저녁을 두 번 차려내고, 술상을 봐오고, 화수분처럼 계속 나오는 설거지를 하는 동안 TV 소리는 계속 귓가를 맴돌고.
나쁘지 않네.
나는 전을 부치며 TV를 보고 있는 세 며느리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배는 안 고프겠지. 나는 밥이 먹고 싶다. 방금 밥을 먹었는데 밥을 내오고 또 내오는 고모들 때문에 괴로워하고 싶다. 하지만 지금의 난, 밥을 먹기는커녕 햇볕에 정수리를 뜨끈히 지지며 멍하니 도로 위를 걷는 신세다.
명절 전야에 시댁으로 끌려가 온종일 음식과 설거지를 해야 하는 신세는 면했다만, 그런 신세인 저들은 적어도, 에어컨 나오는 가겟방에서 기름기 가득한 더부룩한 배를 고통스러워할 수 있지 않은가. 추석날 시댁도 아니고 친정도 아닌 길바닥에서, 나만큼이나 미친 남편과 함께 하염없이 걷고 있는 건 내가 선택한 길이지만, 지금도 그 선택을 바꿀 생각은 없지만, 오늘만큼은 모르겠다.
오늘만큼은, 시어머니 잔소리도 좋고 애 울음소리도 좋고, 도대체가 도움이 안 되는 남편도 괜찮으니, 푹신하고 편안한 의자에 가만히 앉아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온종일 전을 부치는, 그리고 먹는, 한국 어느 소도시의 며느리이고 싶다.
햄버거 반 개로 달랜 속으로 두 시간을 더 걸었다. 돈 쓰고 싶다. 돈 쓰는 거 말고는 기분 전환 방법을 모르는데 젠장, 돈 쓸 구멍이 없다. 예산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왕창 써줄 수 있는데. 비싼 호텔 방 하나 잡아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왜인지도 모른 채 울어버리고 싶은데. 나름 큰 마을인 공근면까지 걸었지만, 비싼 호텔은커녕 작은 여인숙 하나도 없었다. 공근면에 숙소가 없다면 횡성군 전까지는 어림도 없다. 오늘도 야영이다.
"왜 외국인이랑 결혼했어? 저 사람이 부자야?"
▲돈 쓰는 거 말고는 기분 전환 방법을 모르는데 젠장, 돈 쓸 구멍이 없다.
이수지
▲햄버거 반 개로 달랜 속으로 두 시간을 더 걸었다.
이수지
공근면에는 식당이 여럿 있었지만 모두 차례 준비로 일찌감치 문을 닫았다. 결국 공근면에서도 점심을, 아니 저녁을 먹지 못했다. 아침에 나눠 먹은 김밥 하나, 점심쯤 먹은 아이스크림 하나가 오늘 식사의 전부다. 이 불운을 오늘 아침에 미리 알았더라면 아마 발도 떼지 못했겠지. 역시 앞으로 닥칠 고난은 모르는 편이 나은 것 같다.
혹시 모를 한 밤의 아사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구멍가게에서 라면과 물을 샀다. 값을 치르고 있는데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나가니 할머니 한 분이 거의 소리를 지르듯 말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과격한 삿대질을 받아내고 있는 상대는….
"더스틴!"어느 나라 사람이야? 여기서 뭐 해? 누구랑 왔어? 할머니의 질문 공세에 더스틴은 침착하게 천천히, 한국말로 대꾸했다. 국토 종단해요. 철원에서 부산까지 걸어요.
"무슨 일이세요?" 내가 나섰다.
"여기서 부산까지 걸어간다고?"
"네."
"집은 어딘데?"
"집이요? 원래 서울 사는데, 지금은 집이 없어요."1mm가량 더 가늘어진 할머니의 두 눈. 그 안에 담긴 회색 눈동자가 위, 아래로 바삐 움직였다.
"집이 없어? 여기 집값 싸. 여기서 하나 얻지?"
"아 그게 아니라,"
"애기는?"
"……."
"아 애기는?"
"애는 안 낳아요."
"뭐어? 그러면 안되아!"젠장. 또 시작이다. 명절 연휴에 가족과 친척을 멀리 떠나 낯선 시골 땅까지 왔는데, 우리 엄마 아빠도 하지 않는, 시어머니도 하지 않는 명절 잔소리를 들어야 하나? 다 내 잘못이다. 그냥 조만간 낳을 계획이라고 둘러댔어야 한다. 걷다가 만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최대 관심사는 우리의 2세 계획이란 걸, 모범답안은 한 가지라는 걸, 진즉에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골치 아프게 됐다.
▲밭일하는 할머니
이수지
▲횡성 시골길
이수지
"근데….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왜 외국 사람이랑 결혼했어?"할머니가 한 발짝 성큼 다가섰다. 나는 두 발짝 뒤로 물러섰다. 할머니가 다시 한 발짝. 나도 한 발짝. 그렇게 어색하게 왈츠를 추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할머니와 나는 타협지점을 찾아 공근면 한복판에 섰다. 왜 쟤랑 결혼했어? 응?
"그냥 살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왜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외국인이랑 결혼을 했을까? 부자야? 저 사람이 부자야?"
"부자요? 아니요, 부자 아닌데요."할머니는 암묵의 타협을 어기고 한 발자국 다가섰다. 뽀뽀라도 할 기세다.
"있지, 그거 알아? 이왕 외국 사람이랑 결혼하려면 부자랑 해야 돼. 우리 고모 손녀가 방글라데시 남자랑 결혼했는데. 아 그 사람이 워낙 부자여야지. 결혼해서 그 여자도 잘살게 해 주고, 그 여자 부모 형제도 잘살게 해 주고. 그랬다니까? 지금은 서울서 큰 식당 하면서 떵떵거리며 잘 살아."
"아 네. 좋으시겠어요."
"이왕 외국 사람이랑 결혼하려면 부자랑 해야 혀."
"어쩌죠. 이미 결혼을 해버렸는데."
"에이그. 이왕 하려면 부자랑 해야 하는데."이 할머니가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건가. 한국 어느 소도시의 며느리이고 싶다는 아까 그 말, 취소다. 나는 더스틴이 내 남편인 게 좋다. 부자가 아니어도 된다. 외국인이어도 상관없다. 나만큼 미친것도 마음에 든다. 이대로가 좋다. 나는 대꾸 대신 바닥에 놓인 배낭을 어깨에 이었다.
▲풍성한 한가위
이수지
"아 어디가!"
"가려고요. 여긴 잘 데도 없고."
"아 여기 육교 아래에 텐트 치고 자! 육교 건너편으로 가면 시골 깡촌이야! 아무것도 없어! 여기 이 공근면이 이 일대 중심지인데 무얼. 서울로 치면 뭐냐. 그래 여의도! 공근면은 한마디로 말하면 서울의 여의도야! 내가 여기 20년을 살았다고. 이 동네는 해코지하는 사람도 없고 주정뱅이도 없어. 얼마나 좋은 동넨데. 건너편 깡촌으로 가봐. 민박도 없어. 재워주는 사람이라도 있을 줄 알지? 없어!"
"네 할머니. 추석 잘 보내세요."더스틴에게 가자고 손짓했다. 우리는 함께 육교 계단을 올랐다. 육교를 건너는 우리를 졸졸 따라오는 할머니의 시선이 느껴졌다. 민박이 없기는 공근면도 마찬가지다. 누가 재워주길 바라지도 않지만, 공근면에도 재워준다는 사람 하나 없다. 시각은 7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할머니에게 붙잡혀 있는 동안 해가 꼴깍 넘어가 버렸다. 해진 후에는 걷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다. 저 할머니는 무조건 피하고 봐야 한다.
"저 할머니가, 왜 너랑 결혼했녜. 외국인인 주제에 부자도 아닌 너랑."
"외국인이면 부자여야 하는 거였어? 큰일 났네. 부자 될 계획도 없는데."
"내가 할머니한테 왜 네 욕하냐고 막 화내야 했는데. 똑 부러지게 대답 못 했어. 미안?"더스틴이 웃었다. 부자도 아니고 부자가 될 계획도, 부자가 될 일도 없는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어두운 밤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경운기 타고 가는 아빠, 딸, 아들
이수지
홍천 남면(양덕원리)에서 횡성 공근면까지 걷기 |
경로: 홍천 남면 양덕원리 - 시동리 - 유치리 - 횡성 공근면 상창봉리 - 공근리 - 공근면 거리: 약 27.2km 소요시간 : 약 9시간 난이도: 중 추천: ★★★☆☆ (대부분 지방국도를 따라 걷기 때문에 길이 험하진 않지만, 쉴 곳이 없어서 힘들다. 남면에서 멀지 않은 시동리 이후에는 식당을 찾기 어렵다)
경로 소개
홍천 남면 - 시동리
홍천에서 원주로 이어지는 샛길이 있는데, 군에서 만든 비승사격장으로 막혀있다. 횡성 쪽으로 조금 빠졌다가 원주로 갈 수밖에 없다. 샛길은 아니지만, 대부분 지방국도라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다. 가끔 나오는 오르막길 도로는 힘들지만.
시동리 - 유치리 - 횡성 공근면 상창봉리
시동리는 군부대 근처라 식당이 몇 개 있다. 상점, 떡집, 약국 등 필요한 건 다 있는, 당구장까지 있는 마을이다. 여기에서 꼭 밥을 먹고 다시 걸을 것을 추천한다. 우리는 아이스크림만 한 개씩 먹고 걸었다가 이후 식당을 만나지 못했다.
공근리 - 공근면
계속 지방국도를 걷는다. 험한 길은 아니지만 쉴 곳이 없어서 힘들다. 걷다 보면 봉춘막국수가 나오는데 막국수에 질리지 않았다면 꼭 먹고 가길 추천한다. 우리는 먹지 않아서 맛은 모른다만, 이 뒤로도 식당을 찾는 게 쉽지 않으니까.
막국숫집에서 조금 더 걸으면 캠핑장이 있다. 텐트 치는데 3만 원을 받기 때문에 딱히 여기서 쉴 이유는 없다. 조금 더 걸으면 휴게소. 작은 매점인데 돈가스와 우동을 판다. 우리가 갔을 때는 추석이라 햄버거만 팔았지만.
휴게소에서 7km를 더 걸으면 공근면이다. 공근면에는 식당이 몇 개 있고 숙소는 없다. 야영할 게 아니라면 8km를 더 걸어 횡성군 시내로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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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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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외국인이랑 결혼했어? 저 사람이 부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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