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석평의 무덤. 충북 음성군 원남면 하노리 산4-1.
김종성
15대 자손만큼이나 반석평도 매우 영특했다. 노비로 태어났기 때문에 배움의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리고 잘했다. 시키지 않아도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다.
전직 재상인 주인은 어린 노비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했다. 노비로 대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꼬마 노비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꼬마 노비가 자기 아들 및 조카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재상은 꽤 진보적인 사람이었다.
재상의 배려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꼬마의 인생까지 바꿔주기로 결심했다. 아들 없는 부잣집인 반서린의 양자로 만들어주기로 한 것이다. 이 입양이 성사되면서, 꼬마는 반씨 성을 갖게 되고 반석평으로 불리게 되었다. 만약 이 입양이 없었다면, 꼬마가 반씨 성으로 불릴 리도 없고 15대손 역시 그렇게 불릴 리가 없을 것이다.
그 시대의 부자는 일반적으로 농업 대지주였다. 소작농들을 거느린 농업 기업의 사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꼬마 노비가 아들 없는 부잣집의 양자가 됐다는 것은 농업 기업의 후계자가 됐다는 뜻이다. 그 재상이 이렇게 만들어준 것이다. 꼬마 노비에 대한 법적 소유권을 포기하고 그렇게 해줬으니, 상당히 대단한 일이었다. 반석평은 평생을 살아도 갚기 힘든 은혜를 재상집에 지게 된 것이다.
오늘날에는 혈연관계 없는 아이를 입양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옛날에는 달랐다. 친족 중에서 아래 항렬을 입양하는 게 관행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핏줄이 다른 아이를, 그것도 노비 출신 아이를 입양하는 것은 관행에 어긋났다.
따라서 반석평의 입양은 정상적으로 이뤄질 수 없었다. <어우야담>에 따르면, 재상은 꼬마 노비가 행방불명된 것으로 처리했다. 꼬마의 신분을 세탁한 뒤에 반서린의 양자로 입양시켰다. 편법이나 불법이 동원된 입양이었던 것.
이렇게 해서 부자 아버지를 갖게 된 반석평은 자기 친가는 물론이고 주인집과도 왕래를 끊고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했다. 원래의 신분을 숨겨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연산군 때인 1504년 과거시험 소과에 급제해서 생원 자격을 얻고, 중종 때인 1507년 대과에 급제해 고급 관료의 길을 걷게 되었다.
관직에 진출한 반석평은 일도 열심히 했다. 공부하는 열정을 일에 쏟아부었다. 그래서 공직 사회에서도 대단한 성과를 거뒀다. 병마절도사(지역 사령관)를 거쳐 장관급인 공조판서·형조판서에까지 올랐다. 이뿐 아니라 외교관 경력도 쌓았다. 조선을 대표해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진짜 신분이 노비라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대단한 결과였다.
출퇴근마다 가슴 졸여야 했던 반석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