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복을 예쁘게 입은 이대부고 여학생들과 함께 본관 현관 앞에서(1979 12.)
박도
박근혜 정부가 들어설 때 그를 아주 잘 아는 가까운 지인은 대통령 당선 축하의 덕담보다 "5년의 임기를 채울지 걱정이 된다"라고 염려했다.
연초에 한 제자가 강원 산골에 사는 나에게 전화로 문인인사를 하면서 이화여대 총장에 최아무개라는 사람이 뽑혔다는 소식을 전했다. 나는 이름조차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답하자 그 제자는 그 언저리 사람을 말하며 이대의 앞날을 크게 걱정했다.
두 사람의 기우는 2016년 대한민국 국기를 뒤흔든 문제로 현실화됐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박근혜 대통령과 이화여대 총장은 아무 관련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기막힌 그물코 관계로 동반 추락할 뿐 아니라 나라를, 대학을 아주 수렁으로 빠트렸다.
당신뿐 아니라 소속 집단 사람을 매우 허탈케 했다. 기초가 부실하고, 인문적인 교양이 부족한 사람이 지은 모래성에서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허우적거리고 있다. 이게 오늘 우리의 현실이다.
이 초토화된 현실에서 우리들은 망연자실하고만 있어야 할까? 빈 쭉정이를 추수한 농부는 다시 희망을 갖고 다음해 농사를 준비하지 않는가.
이렇게 나라 안이, 우리 교육계가 지탄의 대상이 된 원인을 밝히고 그 대안을 말하고, 다음 세상의 주인들을 위해 살아온 얘기를 진솔하게 남기는 것이 한 훈장으로, 한 글쟁이로 살아온 나의 마지막 소명일 것이다.
우리 역사는 시련을 거듭하면서 발전해 왔다. 시행착오의 교훈을 역사에서 배우는 겨레이어야만 그 시련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고, 문화 선진국이 될 수 있을 테다. 이제 황량한 폐허더미 위에 다시 옷깃을 여미고, 신발 끈을 조이며,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하여 나의 남은 얘기를 마저 풀어나가련다.
완전한 남녀공학학교1976학년도 2학기 개학 첫날 나는 광화문에서 보광동 행 23번 시내버스를 타지 않고, 도중 세검정 삼거리 정류장에서 522번 신촌행 버스를 탔다(나는 평생 운전면허증 없이 대중교통만 타고 다녔다). 연세대 앞에서 내린 다음 걸어서 이대부중으로 출근했다. 집에서 거리는 오산중보다 이대부중이 더 가까웠지만 교통편은 직선 길이 아니라 소요시간은 비슷했다(그 이후 금화터널 개통으로 단축됐다). 나는 첫 등교 길에 비장한 각오를 했다.
지난날 시집을 가는 딸에게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으로 시집 살라는 친정 부모의 말처럼 아내는 그런 당부의 눈빛을 보냈다.
"새파란 솔밭 속에 깃들인 동산…"이대부중고 교가에 나오는 '새파란 솔밭'은 그새 사라져 보이지 않았지만 아주 자그마한 동산이었다. 이 학교는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고등학교'로 그 교명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길었다.
이화여자대학교는 1951년 전쟁 중에도 나라의 장래와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위하여 사범대학교를 창설한 이후, 학생들의 교육현장 실습을 위하여, 대학에 이어 중등교육에도 더 나은 선진 교육이념을 펼치고자 1955년에 부속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애당초 두 학급 100명 학생으로 사범대학의 교육 연구 및 실험 실습학교로 개교했다. 그래서 우리나라 중등교육계의 선도적 학교로 완전한 남녀공학 실시와 더불어 자유복으로 학생들에게 '자율과 책임'을 다하게 하는 창의적이며, 민주교육의 실현의 장으로, 사범대학 본래의 역할을 담당케 했다.
이후 이 학교는 중등학교의 평준화 정책으로 본래의 성격과 다소 달라져 당국의 지시로 교복을 착용케 했고, 학교의 규모도 4학급으로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