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의 과거 음담패설 녹음파일을 보도하는 CNN 뉴스 갈무리.
CNN
한국에서도 트럼프는 '막말'로 잘 알려져 있다. 정말이지, 되는대로 내뱉는 말을 듣고 있자면 그가 지도자로서 기본적인 자질을 갖추고 있는지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그를 정말 위험한 인물로 만드는 것은 '입'보다 '머리'다.
꼭 머리가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트럼프는 정치적으로 매우 영리한 사람이다. 그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안다. 매우 뛰어난 정치 감각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모든 정치인은 대중들이 공감할 언어를 찾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트럼프는 그럴 필요가 없다. 평생 대중의 언어를 써 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공적 언어와 사적 언어를 구분하지 않는 미국 최초의 대선 후보일 것이다.
정치인은 대개 모호한 언어를 구사한다. '다양성,' '공동체' 같은 추상적 가치를 다루는 탓이기도 하지만, 최대한 많은 유권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뚜렷한 선 긋기를 주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트럼프의 단순하고 거친 언어는 이 미끈한 '위선의 언어'를 혐오해 온 다수의 국민들에게 청량감을 준다.
그런 면에서 트럼프의 부상은 '대중 정치혁명'이라 할 만하다. 정치인의 언어로 대중을 흔드는 게 아니라, 대중의 언어로 정치를 흔들어 대권 후보 자리를 거머쥐었기 때문이다. 최근 트럼프는 성희롱 발언 비디오가 공개되어 맹렬히 비난받고 있고, 공화당 유력 정치인들 다수가 지지를 철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핵심 지지세력은 절대 이탈하지 않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트럼프야말로 대중들과 가장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부동산 재벌이자 연예계 스타로, 전 세계에 수십 채의 고층건물과 호텔, 리조트를 가지고 있고(한때 뉴욕의 상징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공동소유하기도 했다), 자신의 이름으로 된 언론 매체와 모델 기획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자신의 이름을 상표로 단 의류, 보석, 향수를 세계 12개국에서 생산하고 있다. 물론 그곳을 둘러볼 때는 개인소유의 757 제트기와 헬리콥터를 이용한다.
이런 트럼프를 다수의 서민들이 '자신의 편'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정치적 금기어'에 구애받지 않고 발언하는 그가 자신들의 절망과 분노를 이해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해하는 듯 보이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며, '이해하는 것'과 '해결하는 것'은 더더욱 다른 문제다.
트럼프는 서민들의 문제를 이해할 경험의 공감대도, 그 문제를 해결할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일자리, 세금, 불법 이민자 등을 둘러싼 대중들의 불평에 대해 생생한 '날것의' 언어로 함께 분노하며, '다시 위대한 미국을 만들자'고 포효할 뿐이다.
도대체 어떤 시절의 미국이 '위대한 미국'이었는지, 어떻게 하면 그런 상태를 회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답변은 준비되어 있지 않다. 이 부분은 '입'이나 '감각'의 영역이 아니라 '머리'와 '의지'에 속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최고로', '진짜로'가 대책인 후보구체적 해결책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트럼프는 회피와 동문서답 사이를 오간다. 실업 대책은 "조물주가 만든 최고의 일자리 대통령이 되겠다"이고, 이슬람 국가(IS)의 위협에 대처할 방안은 "적들이 알면 안 되니까 미리 말할 수 없다"는 식이다. 이런 농담 같은 현실에 대해 트럼프의 비판자들은 또 다른 농담으로 답한다.
"힐러리 클린턴이 당선되면 미국의 최초 여자 대통령. 트럼프가 당선되면?""미국의 마지막 대통령."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미국이 망할 거라는 이야기인데, 미국 유권자 절반 가까이가 상상조차 꺼리는 이 '끔찍한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는 빌 클린턴 시절 미국에 와서 부시와 오바마의 연임을 지켜보았고, 이제 미국 45대 대통령의 탄생을 눈앞에서 보고 있다. 이처럼 미국에서 꽤 오래 지낸 편인데도, 트럼프의 미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을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첫째, 트럼프가 당선되더라도 역사 국정교과서를 만드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통치자가 직접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민주국가는커녕, 왕조시대에도 없던 몰상식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렇게 만들어진 정부 교과서를 내용조차 공개하지 않은 채 사라고 강요하는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를 양심적인 사업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상품을 써 본 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환불하는 원칙 정도는 지켜온 사람이다.
둘째, 트럼프가 백악관 집무실에 자리를 틀더라도, 300명이 넘는 국민이 물에 빠져 숨져가는 순간 대통령이 증발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리얼리티쇼 <어프렌티스> 시절부터 '지도자의 역할'을 끊임없이 강조해 온 사람이다. 나는 결코 그가 훌륭한 지도자감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국민 목숨을 지키지 못한 것도 모자라 희생자 가족을 외면하고 괴롭힌다면 이건 '훌륭한 지도자'를 따질 계제가 아니다.
셋째, 자신을 비판한 연예인과 작가를 '블랙리스트'에 올려 탄압하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트럼프 맞선 가장 강력한 저항군은 할리우드 연예인과 작가들이다. 제니퍼 로렌스, 조지 클루니, 맷 데이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벤 스틸러, 잭 블랙, 수잔 서랜든, 새뮤얼 잭슨, 조니 뎁, 리처드 기어 등의 스타 배우와 스티븐 킹과 조앤 롤링 등의 작가들은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