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든 아이들광화문에서
이희동
그러자 이번에는 첫째가 물었다.
"아빠, 그럼 시신 탈취는 뭐야? 경찰이 와서 죽은 사람을 데리고 가?""응? 아냐. 죽은 사람을 그렇게 하면 안 되지. 뉴스에서도 그러면 안 된다고 하는 거야."녀석은 여전히 궁금증이 풀리지 않은 듯 뭔가 질문을 하려고 했지만, 나는 서둘러 TV 채널을 돌렸다. 더 이상 TV를 보다가는 절대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갑작스레 이제 그만 들어가서 자라고 종용하는 아빠와 뭔가 꺼림칙한 아이들. 어쨌든 난 그렇게 위기를 모면했다.
경찰을 경찰이라 부르지 못하는 비극그렇게 아이들을 잠자리에 들여보냈지만 나 역시 찝찝한 건 매한가지였다. 녀석들의 대답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나서야 아버지의 직업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직업이 뭐냐는 나의 질문에 항상 '공무원', '내무부 산하 공무원', '서울시 공무원'이라며 대충 얼버무리셨는데, 내가 우연찮게 아버지 월급 명세서에 박혀있는 독수리를 보고 그제야 당신이 경찰임을 알게 된 것이다.
어머니는 왜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내게 아버지의 직업을 이야기 하지 않았을까? 이에 대해 어머니의 대답은 단호했다. 아버지가 경찰이라는 사실을 주위 사람들이 알게 되면 손해가 컸으면 컸지, 절대 이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한국전쟁 예를 드셨다. 당시 북한군이 넘어와서 가장 먼저 사살했던 이들이 군경의 가족이니, 혹여 다시 전쟁이 나면 우리 가족은 주민등록증부터 폐기해야 한다고 하셨다.
어디 그뿐인가. 어머니는 우리 사회에서 경찰이라는 직업이 결코 떳떳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일제강점기 순사부터 시작해서 군사정부의 하수인까지, 아직도 사람들의 뇌리 속에 경찰은 '짭새'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아버지가 사람이 좋다고 하지만 경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사람들이 어쨌든 편견을 가지고 바라본다던가.
마지막으로 어머니는 아버지가 경찰이라서 겪는 고충에 대해 말씀하셨다. 친인척이나 친구들이 곤란한 일만 있으면 부탁하는데 그것이 참으로 모순적이라는 것이다. 부탁을 들어주면 그만큼 경찰이 사적인 인연에 휘둘리는 한심한 조직이 되고, 들어주지 않으면 매몰차다고 욕을 먹게 되는 상황. 어머니는 그것을 경찰이라는 직업이 가지고 있는 숙명으로 받아들이셨고 그래서 아버지를 안쓰러워 하셨다.
아버지의 직업을 부끄러워하는 어머니. 그러나 나는 어린 마음에 그런 어머니의 태도가 싫었다. 아버지의 직업을 당당히 이야기하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기 싫었다. 경찰이 무슨 죄를 진 것도 아니고, 어쨌든 교과서에서는 경찰이 자랑스러운 직업 아니던가.
그래서 처음에는 친구들에게 아버지가 경찰임을 더욱 강조하고 다녔다. 아버지가 경찰임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머리가 굵어지면서 나 역시 아버지의 직업을 굳이 입에 담지 않게 되었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경찰이 공권력의 화신으로서 어떤 일을 해왔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아버지가 부끄러운 건 절대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 시대 경찰로서 자신의 맡은 바 최선을 다하셨고, 보수적인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나름 개방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셨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신촌 사거리에서 교통정리를 하다가 동교동으로 향하는 시위대를 맞닥뜨렸지만 그들의 안전을 위해 차들을 막고 박수를 받았다는 아버지를 난 존경한다. 당시 그것이 아버지의 최선이었고, 그런 최선이 모여 역사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런 경찰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은 아버지가 정년퇴직을 하시고 국민의정부가 들어서면서 긍정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경찰은 공권력의 최전선에서 국가의 얼굴을 대신하고 있었지만, 세상이 점점 변하면서 경찰도 달라질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민주화 이후 교육을 받은 세대들이 사회의 주역이 되고 있으니 그만큼 경찰도 달라지지 않겠는가.
부끄러운 경찰을 만들지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