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딸기 크림봉봉>1800년대 식물 세밀화를 바탕으로 한 따뜻한 그림
씨드북
비록 글로 배운 베이킹이라 정교한 손맛이 떨어지지만 시간이 날 때면 빵과 과자를 구워 아이들에게 먹이기를 좋아한다. 사실 아이들보다 내가 더 빵과 과자를 좋아한다. 길 가다 빵집을 보면 지나치지 못하고 문을 열고 들어간다.
갓 구운 빵 냄새를 맡으며 빵실빵실한 빵들을 구경하노라면 구름을 타고 하늘을 누비는 듯하다. 평생의 숙제인 다이어트 때문에 양껏 먹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지만 어제도 오후 9시에 빵을 두 개나 먹었다.
굳이 '2015 뉴욕타임스 선정 올해의 그림책'이란 타이틀 없이도 표지와 제목만으로 빵순이 나를 끌어당긴 책 <산딸기 크림봉봉>. 음식에 관한 책을 여러 권 봤던 터라 그 비슷한 내용이겠지 생각하며, 그저 맛있는 상상만을 하며 책을 펼쳤다. 그런데 책은 기대 이상, 상상 이상! 정수기와 밥솥 사이 가계부 꽂아두는 곳에 함께 꽂아두고 수시로 꺼내 보고 싶은 책이었다.
'수백 년이 흘러도 한결같은 맛 산딸기 크림봉봉의 비법을 공개합니다'라는 책 표지에 적힌 문장처럼 수백 년이 흘러도 내 아이의 아이, 그 아이의 아이들에게도 바람의 속삭임으로 들려주고 보여주고 싶다.
300년을 이어 온 행복한 맛"디저트라는 소재를 통해 어른과 어린이 독자 모두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었"다는 글작가 에밀리 젠킨스는 16세기부터 이어져 온 과일 크림봉봉(fruit fool) 중에서도 블랙베리 크림봉봉을 소재로 삼아 300년의 시간 동안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음식이 어떻게 연결되어 흘러왔는지 보여 준다.
1710, 1810, 1910, 2010년 총 4부분으로 나뉘어 보여주는 시대의 변화는 건축양식과 복장, 조리도구와 냉장기술, 가족구성과 가족 내 가사노동의 풍경으로 보여준다. 글 작가의 성실한 자료 조사는 그림 작가 소피 블래콜에게도 이어진다.
300년 전 조리도구를 직접 만들어 크림을 휘저어 보고, 박물관에 직접 가 옛날 옷감을 관찰하고 노예를 부리던 가족의 일기까지 찾아 읽으며 일상을 세세하게 재현했다는 두 작가의 후기는 산딸기 크림봉봉만큼 맛있는 디저트이다.
1800년대 식물 세밀화를 바탕으로 한 따뜻한 책 표지를 넘기면 짙은 보랏빛 면지가 나온다. 그림책 작가가 보물찾기 하듯 면지에 담아놓은 의미 찾기를 즐기는데 처음엔 선뜻 보이지 않았다. 그림책 작가의 후기를 읽고 나서야 마지막 그림의 채색을 마친 뒤 블랙베리를 으깨고 체에 걸러낸 보랏빛 즙으로 면지를 칠했다는 알게 됐다. 달짝지근한 냄새가 손에 묻을 것만 같았다.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으로 시작하는 이야기. 영국의 라임이라는 마을, 갓난아기를 업은 엄마와 일곱 살 쯤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가 덤불을 헤치며 산딸기를 딴다. 당시 복장사를 알려주는 풍성한 치마가 산딸기 덤불에 툭툭 걸린다.
300년 전엔 엄마가 우유를 짜고 나뭇가지로 만든 거품기로 15분을 저어 폭신한 크림을 만든다. 수도가 없어 딸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고, 냉장고가 없어 언덕배기에 있는 얼음 창고에 산딸기를 넣은 크림을 얼린다.
저녁 식탁엔 (일 할 땐 보이지도 않던) 양복을 입은 아빠와 무려 네 명이나 되는 오빠들이 앉아 촛불을 켜고 음식을 먹는다. 오직 엄마와 딸만이 일어나 부엌과 식탁을 오가며 음식을 나른다. 딸은 식탁에 앉지도 못하고 부엌에 앉아 양푼에 남은 산딸기 크림봉봉을 긁어 먹는다.
그로부터 100년 후, 1810년 미국 찰스턴 도시 변두리로 간다. 역시 엄마와 딸이 산딸기를 딴다. 앞의 이야기와 다른 것이 있다면 흑인 모녀라는 것, 숲 속이 아닌 농장에서 재배한 산딸기를 따고 있다는 것.
100년 동안 기술은 발전해, 젖소 농장에서 우유크림을 집으로 배달을 해주고 쇠로 만든 거품기로 10분을 저으면 크림을 부풀어 오른다. 언덕배기에 있던 얼음창고는 지하실의 얼음을 채운 나무 상자가 되었다. 자신들이 만들었지만 흑인모녀는 주인집 식사가 모두 끝난 늦은 밤에야 "벽장에 숨어" 양푼에 남은 산딸기 크림봉봉을 긁어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