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과 달리 1960년대 터널 공사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다. 특히 당재터널 공사에선 아홉 명 인부가 목숨을 잃었다.(사진은 영화 터널(2016) 중 한 장면)
터널(2016)
지금은 대한민국의 터널 뚫는 기술이 발달하여 60km에 육박하는 터널도 뚫고, 해저터널도 속속 개통할 정도가 되었지만, 이제 막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해야 한다던 1960년대에는 터널 뚫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테다.
터널이 없었던 대전-서울 구간, 터널이 단 하나밖에 없었던 동대구-부산 구간에 비해 추풍령과 소백산맥, 그리고 금강을 여러 번 관통해야만 했던 대전-대구 구간은 난공사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앞서 말했듯, 일흔 일곱 명의 사망자 중 무려 아홉 명이 당재터널 공사현장에서 나왔다고 한다. 추풍령의 다른 터널에 비해 돌의 성질이 고르지 않고 땅이 약해서 터널만 뚫었다 하면 무너져내렸다고 한다.
열 세번을 무너졌는데, 한 번은 무너지면서 네 명이 죽고, 한 번은 무너지면서 작업반장이 목숨을 잃기도 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산신령이 노하셨다' 내지는, 산 전체가 귀신이 씌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고 한다.
지금이야 1km 넘는 터널 뚫는 일이 '껌'이나 다름없지만, 당시에는 가장 긴 500~600m짜리 터널과 장대교의 공사가 어려웠을 터. 공사를 위해 당시 가격이 두 배나 비쌌던 조강시멘트가 들어갔다.
공사를 맡았던 현대 정주영 회장의 회고에 따르면, 인력이 부족해 육군 건설공병단을 새벽 5시부터 밤 12시까지 동원한 끝에 완공을 이틀 앞둔 7월 5일 완공이 되었다고 한다. 그마저도 완벽하지 않아서, 개통 당일까지 막바지 작업이 이루어졌다고도 했다.
영화 <터널>만큼이나 긴장감을 주는 이야기가 '터널'이 촬영된 당재터널에 담겨 있었다. 변변한 장비도 없었고, 산골 한 가운데에 마땅한 진입로도 찾지 못한 채 막무가내로 진행된 공사.
인부들이 씻지 못해 땀이 굳어 발가락이 붙어버리고, 소변 볼 시간이 아까워 바지에 그대로 누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현장에서 사망한 아홉 명의 한(恨)이 지금은 작은 지방도로 격하된 600m짜리 쌍굴에 담겨 있다.
난공사 구간이었던만큼, 추풍령 구간은 가장 많은 사고가 난 곳으로 악명이 높았다. 1970년대에는 황간을 막 지난 고속버스가 낭떠러지로 추락해 스무 명의 사람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고, 2000년에는 추풍령 경부고속도로 부산방향에서 수학여행을 떠났다 돌아오는 버스를 포함한 교통사고가 발생해 사망자 18명(14명은 학생) 등 100여명의 사상자를 내기도 했다. 결국 사고가 일어났던 구간의 운영을 지속하는 것에 대한 비판여론이 일었고 80km/h로 묶여있던 제한속도에 대한 불편여론도 늘어났다.
2000년대에 옥천휴게소-추풍령 구간에 대한 개량이 이루어졌고, 당재터널은 옥천터널로 이름을 바꾼 채 지방도로 격하되었다. 현대사의 비극을 대표했던 터널은, 영화 <터널>에서 터널의 문이 닫히듯 관심갖는 이 없이 쓸쓸하게 퇴장했다.
험하고 두려웠던 난공사... 등록문화재 지정으로 보듬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