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공훈련' 때 46번 독수리였던 기자(1969. 5.)
박도
우리 7기 학훈단에게는 '특공훈련'이라는 교과가 새로 생겨났다. 아마도 그것은 그 당시 북한군 특수훈련에 자극을 받아 그에 대비한 특수훈련으로 기존의 유격훈련을 강화시킨 듯했다.
우리는 계급장과 군번을 모두 반납했다. 나는 '46번 독수리'였다. 훈련복도 억센 옷감인 특수복장이었다.
교육내용은 도피 및 도망, 도하, 대검투척, 암벽 타오르기, 암벽 뛰어내리기, 줄 타고 하강 등으로, 훈련 강도가 몹시 셌다.
훈련 중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전사고가 나기 마련이었다. 나는 이 훈련을 통해 사람은 독한 마음을 먹으면 불가능은 거의 없다는 것을 깨우쳤다.
특히 도피 및 도망 훈련 때 그날 밤 장성의 불태산을 넘었는데 그날이 내 제삿날인 줄 알았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두컴컴한 밤에 길을 잃어 넘어지고, 절벽에서 떨어지는 등, 그날 밤 그 산골짜기에서 그대로 죽는 줄 알았다. 그런 교육을 통해 극한 훈련은 인간도 개조시킬 수 있다는 것을 터득했다.
나는 이 훈련을 통해 대검을 던져 10여 미터 밖의 나무에 정통으로 꽂을 수 있었고,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도 대항군을 제압하고 적진을 탈출할 수 있는 능력도 길렀다.
이 특공훈련으로 다른 중대에서 두 명의 동기생이 희생됐다. 이들의 희생비는 홍익대 출신 동기생 고 이두식 화백의 설계로 방송인 이상벽씨 등이 주동이 돼 세웠다고 한다. 그 자리에 참석한 동기생들은 스페인 민요 <친구의 이별>을 부르며 그들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이 화백은 그때의 정황을 울먹이며 전했다.
서편의 달이 호숫가에 질 때에 저 건너 산에 동이 트누나사랑빛이 감도는 빛난 눈동자에는근심어린 빛으로 편히 가시오친구 내친구 어이 이별 할까나친구 내친구 잊지 마시오.그 얘기를 전한 이 화백도 몇 해 전에 선종했다.
동기생들 가운데는 광주 인심이 짜다고 불평했지만 내 경우는 그와 반대였다. 그해 5월 하순, 우리 중대는 '중대 공격과 방어' 교육을 받으러 보병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장성의 어느 멧부리 교장에 갔다.
우리 교육생들이 야외 교장에 막 도착하자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졌다. 마땅히 피할 장소도 없었다. 우리들은 우의를 입은 채 교장 잔디계단에 앉아 10여 분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지만 하늘은 구멍이 뚫린 듯 굵은 빗방울이 그치지 않았다.
담당 교관은 내내 하늘을 쳐다보다가 악천후로 더 이상 교육이 불가능해지자 결단을 내렸다. 그는 오전 교육을 오후에 몰아서 하겠다고 하면서 어디 가서 비를 피하고 12시 50분까지 교장으로 집합하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 피교육생들은 오랜만에 3시간 남짓 자유 시간이 생겼다. 그때의 기쁨이란…. '자유'가 그렇게 좋을 줄이야.
우리 피교육자들은 교관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후딱 산 아랫마을로 내려갔다. 마을에 이르자 하늘은 언제 비를 쏟았나 싶을 정도로 금세 쾌청했다. 우리들은 휘파람을 불면서 꿀맛 같은 자유시간을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