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15일 오전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제71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축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우리 내부에서는 대한민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잘못된 풍조가 퍼져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위대한 현대사를 부정하고,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나라를 살기 힘든 곳으로 비하하는 신조어들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법을 불신하고 경시하는 풍조 속에 떼법(떼쓰기) 문화가 만연하면서 사회적 비용이 증가되고, 대외 경쟁력까지 실추되고 있습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양보, 신뢰를 바탕으로 하기보다는 불신과 불타협, 상대방에 대한 인신공격들로 사회를 혼란시키는 일도 가중되어 가고 있습니다."축사를 듣던 귀를 의심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헬조선' 담론을 정면 겨냥한 것이다. '잘못된 풍조'이자 심지어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나라"를 "비하하는 신조어"로 규정하고, 떼쓰기 문화와 불신, 불타협과 인신공격의 연장선상에 놓고 사회 혼란의 주범으로 지목하다니. 이 헬조선 담론이 정확히 박근혜 정권에서 탄생했다는 건 알고 있었던 걸까.
더 가관인 것은 이를 반박하며 박 대통령이 내놓은 해법의 시대착오다. 뒤이어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 발전의 원동력이었던 도전과 진취, 긍정의 정신을 되살려야 합니다"라며 "맨주먹"과 "할 수 있다", "함께 가는"과 "콩 한쪽도 서로 나누며 이겨내는 건강한 공동체 문화" 등을 운운했다.
20세기 어느 시점의 광복절 축사라 우겨도 별다를 바 없는 시대착오적이요, 교과서적인 개념어들만이 난무하는 기존의 대통령 연설과 다를 바 없는 내용이었다. 더욱이 왜 '헬조선' 담론이 출몰했는지, 나락으로 떨어진 삶의 질과 함께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의 정부 대응 이후 헬조선 담론이 공감대를 얻었는지 전혀 이해하지도, 이해할 생각도 없는 연설이라 할 수 있다. "콩 한쪽 말고 송로버섯을 나누자"는 비아냥이 도처에서 나온 이유다. 문제는 또 있다.
여전히 '남탓', '국민탓' 하는 박 대통령"저성장이 고착화되는 어려운 상황에서 모두가 '남 탓'을 하며 자신의 기득권만 지키려고 한다면 우리 사회가 공멸의 나락으로 함께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중략) 기업주는 어려운 근로자의 형편을 헤아려 일자리를 지키는 데 보다 힘을 쏟아주시고, 대기업 노조를 비롯해서 조금이라도 형편이 나은 근로자들께서는 청년들과 비정규직 근로자들을 위해 한걸음 양보하는 공동체 정신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청년들과 비정규직 근로자들을 위해 우리 국민 모두가 자신의 기득권을 조금씩 내려놓고 노동개혁의 물꼬를 트는 데 동참해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을 박 대통령은 불렀지만, 진정 존경스러운 건 박 대통령이다. 역시나 빠지지 않으리라 여겼던 '노동개혁'이 등장했지만, 이를 "남 탓만 하며 기득권을 지키려는 국민들"의 탓으로 돌리는 신묘한 발언을 이어간 것이다. 대기업 노조를 비롯해 국민들이 남 탓하며 기득권을 지키니 노동개혁은 물론 국민경제가 살아나지 않는다는 이 해괴한 논리. 박 대통령의 '유체이탈화법'이 이렇게 진화했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이 연설이 '광복절 경축사'였다는 점이리라. 박 대통령은 한일관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이 자신의 유행가를 반복했다. '북핵' 말이다. 박 대통령은 연설 말미 "오늘 제71주년 광복절을 맞아 북한 당국에 촉구합니다"라며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 개발과 대남 도발 위협을 즉각 중단하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사드 배치의 정당성을 항변한 이후 바로 북한 당국 운운하며 강수를 둔 것이다. 만약 박근혜 대통령이 최근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위안부 합의와 일본의 출연금, 화해치유 재단의 운용 방안과 같은 실질적인 해법을 제시했다면, '북핵 장사'는 일정정도 진심으로 받아들여 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럴 리가. 박근혜 대통령은 이마저도 아래와 같이 두루뭉술하고 짧은 표현으로 '퉁'치고 넘어갔다.
"한일 관계도 역사를 직시하는 가운데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새롭게 만들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냉철한 현실 인식에 바탕을 둔 선제적이고도 창의적인 사고입니다."달라진 것 없는 대통령, 폭력적인 정부 "전혀 달라진 게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그 합의를 기본으로 해서 일본 정부가 배상금도 아니다. 우리는 법적 책임을 인정한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내년 10억 엔을 가지고 재단을 만들어서, 그 이름이 화해와 치유 재단. 일본은 계속 망언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피해자들에게 치유가 되고 화해가 되겠어요? 그것이 유일한 길이에요. 이것은 할머니들의 마음을 너무나 모르는 정부의 태도입니다. 너무나 무책임하고 너무나 폭력적인 정부입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광복절인 15일 오전, SBS 라디오 <한수진의시사전망대>와 인터뷰를 한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상임대표의 답변 중 일부다. 윤미향 상임대표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정말 해방이 되긴 했나요?"라고 묻는다면서 "일본 정부의 과거 잘못 인정과 사죄, 법적인 책임"을 여전히 요구했다.
그렇다. 달라진 게 없다. "제71주년 광복절이자 건국 68주년"이라 강조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역사 인식도, 이를 바탕으로 졸속 합의된 위안부 문제도, '헬조선' 담론과 국민들의 '남탓'을 비판하는 대통령의 '남탓'도 여전하다. 아, '머슴'을 자처하는 신임 여당 대표에게 송로버섯과 캐비아 같은 고급 요리를 대접하는 박 대통령의 천진함과 제 사람 챙기기도 여전하다.
그리고 여전히 무책임하고 폭력적인 정부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물론 국민들의 실제 여론과 생활은 안중에도 없이 송로버섯 만찬이나 즐기는 대통령과 청와대, 여당에게 더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 국민들이 요금 폭탄 걱정하며 에어컨도 틀지 못하는 대한민국 2016년의 8월의 폭염이 야속하기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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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및 작업 의뢰는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취재기자, 현 영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서울 4.3 영화제' 총괄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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