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찾아간 박타푸르에서 ‘비욘드 네팔’을 찾아 헤매고 있을 때 안내자가 돼주었던 네팔 소녀 씨라파.
송성영
카트만두행 버스는 포카라를 벗어나 비좁은 2차선 도로를 달리고 있다. 차량들이 서로 폭 좁은 도로를 추월하는 것은 다반사다. 인도에서부터 이미 숱하게 경험을 했기에 이제 이골이 났다. 곡예 운전에 무감각해진 나는 창밖 풍경을 즐긴다.
도로 주변 곳곳에 강줄기가 보인다. 히말라야 설산에서부터 흘러 내려온 강물이다. 굽이치는 강줄기에서는 고무보트를 타고 힘차게 노를 저어가며 래프팅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이고 수심 낮은 폭 좁은 샛강에서는 아이들이 발가벗고 물놀이 하는 모습도 보인다.
농부들의 논밭을 풍요롭게 해주는 생명의 젖줄인 강물은 사람은 물론이고 크고 작은 도시에서 쏟아내는 온갖 오염물을 껴안고 바다로 흘러간다. 히말라야에서부터 흘러내려온 저 네팔의 강줄기가 내가 뿌리내리고 있는 한반도의 앞바다와 이어져 있듯이 삼라만상 모든 인연들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
네팔에서 만나는 인연들이 그렇다. 혼자서 외롭게 떠돌고 있지만 바다가 온갖 크고 작은 물줄기들을 품어 안듯이 난생 처음 만나게 될 낯선 도시, 박타푸르 어딘가에 바다처럼 너른 품을 가진 사람들이 반겨줄 것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내게 다가온 네팔 소녀포카라에서부터 거의 6시간 만에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곧장 박타푸르(Bhaktapur)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낡은 자동차들이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는 네팔의 중심지, 카트만두의 첫 인상은 혼잡하고 탁하다. 더위와 함께 탁한 공기가 숨 막히게 다가온다.
버스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가 마치 우리의 경기민요인 방아타령처럼 흥겹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네팔 청년에게 물었더니 네팔에서 농부들이 일할 때 부르는 전통민요, 일노래라고 한다. 듣고 또 들어봐도 우리의 방아타령 "에헤헤야, 에헤라~ 우이겨라 방아로구나~" 곡조와 비슷하다.
박타푸르에 내려 무조건 '비욘드 네팔'을 찾아 다녔다. 버스 정류장 주변에서 영어를 할 줄 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물어 물어봤지만 '비욘드 네팔'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줄지어 서 있는 택시 기사도 모르고 경찰조차도 처음 듣는 단체라며 고개를 돌린다.
엔지오 단체, '비욘드 네팔'에서 변호사 출신의 네팔 남자와 함께 일하고 있다는 한국인 여성, 정성미씨가 이메일을 통해 알려준 전화번호가 있었다. 하지만 공중전화 부스조차 보이지 않는다. 네팔에 들어서면서 손전화기를 정지시켰다. 그렇다고 전화 한 통화를 위해 네팔에서 통화가 가능한 심카드를 따로 구입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다친 무릎을 압박해 오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절룩거리며 무모하게 30여 분을 헤매고 다녔다. 생수도 바닥이 났다. 입술이 바싹 바싹 타들어가고 옷은 이미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다.
목을 축이기 위해 작은 구멍가게로 들어가 '비욘드 네팔'을 물었더니 가게 주인은 영어를 할 줄 모른다. 때마침 눈빛이 초롱초롱한 네팔 소녀가 가게로 들어섰다. 내게 서슴없이 '나마스테' 인사를 건네더니 네팔어로 주인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나서 영어를 쏟아냈다.
"비욘드 네팔을 찾고 계신다고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알아요? 비욘드 네팔이 어디에 있는지?""모르지만 제가 찾는 데 도움을 드릴게요.""고맙습니다."소녀는 내가 알아듣지 못할 정도의 영어를 빠르게 구사했고 생소한 단어들을 나열했다. 나는 소녀에게 '비욘드 네팔'에서 몸담고 있는 정성미씨가 이메일을 통해 알려준 전화번호를 내밀었다. 소녀는 가게 주인이 자신의 엄마의 언니, 이모라며 선뜻 전화기를 건네줬다. 하지만 통화가 되질 않았다. 전화번호를 잘못 적어 온 것이 분명했다. 난감했다.
"저를 따라 오세요. 제가 아는 엔지오 단체가 있는데 그곳에서 물어보면 될 것입니다."소녀는 자신이 '비욘드 네팔'을 알 만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겠다며 앞장서 걸었다. 걸음걸이가 속사포로 쏟아대는 영어 실력만큼이나 빨랐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절룩거리는 다리를 질질 끌고 무작정 소녀를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