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계역. 과거 이 철길을 따라, 석탄과 시멘트를 싣은 화물열차들이 무수히 다녔다.
이준수
아차 싶었다. 성호의 당찬 음성에는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담겨있었다. 지금은 인구 1만2천여 명의 작은 읍이지만 1980년대 중반만 해도 5만 명이 넘는 주민들이 도계에 살았다. 동네 강아지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지난날의 영광은 사라졌지만 사람들 가슴속에는 여전히 잘 나가던 시절의 향수가 남아있었다. 그러던 중 대한석탄공사 폐지 보도가 터진 것이었다.
6개의 모둠이 모두 만장일치로 폐광 이슈를 지역의 '도시 문제'로 선택하였다. 여긴 미칠 듯한 전셋값 폭등이나 숨 막히는 출퇴근길 같은 현상은 없다. 다만 과거 도시였던 지역이 현재 촌락으로 위세가 줄어들었고, 그나마 남은 삶의 터전마저 위협받는 상황이 되었으니 진짜 '도시 생존 문제'라고 볼 수 있었다.
"동균이는 인터뷰하고, 주민이는 글씨 쓰고, 인정이는 사진 찍는 게 어때?"
"우리 큰 아빠가 석공(대한석탄공사)에 있어. 내가 갔다 올게."
조사 기간은 7일. 아이들은 스스로 역할을 나눠 흩어지고, 모이고, 정리하고를 반복했다. 발표 당일, 전지(A1 사이즈의 종이)에다 조사한 내용을 기록한 학생들의 표정이 진지했다. 모둠별로 제출한 스마트폰에는 인터뷰 음성 파일이 담겨 있었다. 컴퓨터에 모아보니 11개나 되었다. 발표는 예상보다 훨씬 훌륭했다. 글씨는 못생기고, 자료 배치는 어설펐지만 설명이 귀에 잘 들어왔다. 결정적으로 대본이 발표자의 손에 없었다. 그건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는 증거였다.
학교에서 아이들 발표를 시켜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어디서 대충 긁어온 자료인지 아니면 내용을 잘 흡수해서 자기 언어로 풀어내고 있는지 말이다. 헷갈릴 때는 질문을 몇 가지 던지면 되는데 이 날은 교사가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머지 학생들이 알아서 날카롭게 지적했기 때문이다.
"석탄공사가 폐지되면 우리 지역 말고 다른 지역에는 어떤 문제가 생기나요?"
"폐광을 막기 위하여 초등학생들이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나요? "
지식과 지혜를 총동원하여 성심껏 대답하는 모습에 솔직히 놀랐다. 말하는 모양새가 단편적인 사실을 전달하는 형태 그 이상이었다. 지역을 지켜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 절실함이 담겨있었다. 질문자들도 상대 모둠의 허점을 파고들기보다 조사하면서 해결되지 않은 의문점에 집중했다. 교실에서 교사가 강의식으로 가르쳤다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장면이었다.
'도대체 뭘까? 조사 프로젝트 여러 번 했었는데 그 때는 별로였는데. 갑자기 이렇게 잘할 수 있나?'
약간의 놀라움과 의구심을 품고 있던 차에 인터뷰 음성 파일을 재생할 차례가 되었다. 11개의 인터뷰를 하나씩 들어보았다. 석탄회관 앞 편의점 할머니, 천일약국 약사 아주머니, 고려명과에 빵 사러 온 아저씨, 우체국 직원... 앳된 초등학생의 목소리와 마을 사람들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광산이 문을 닫으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
"억울한 일이 생기지. 산업 전사라는 말을 들으면서 막장에 들어갔는데 지금 와서 나가라니까."
"적자 때문에 석공을 폐쇄하는데 방법이 없을까요?"
"그럼 다른 일자리를 가질 수 있게 대체 산업을 마련해야지."
인터뷰 파일 하나마다 평균 재생시간 1분 30초. 어리다고만 여겼던 녀석들이 삼삼오오 스마트폰을 들고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고 하니 새삼 대견스러웠다. 또 공무원, 노조 활동가, 주부, 자영업자 등 다양한 직군을 취재하였기에 여러 입장을 비교하여 들을 수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대부분 폐광에 반대하는 분들이었지만 찬성 입장에 선 아저씨 한 분도 있어 흥미로웠다.
'이리 멋지게 해낼 줄 알았다면, 평소에 더 자주 학교 밖으로 내보낼걸.'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들은 학생들에게 수고한다며 손에 주스와 과자를 쥐어주시기도 하였다. 인터뷰 내용을 편집하고 조리 있게 안내하는 아이들의 아담한 뒷모습이 문득 커 보였다. 또 학급에서 유일하게 폐광에 찬성하는 원혁이가 소신껏 주장을 피력할 때도 청중들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을 뿐, 야유나 폭력적 언사가 쏟아지지 않았다. 조마조마하게 마음 졸인 건 소심한 담임 혼자였다.
선거하고 투표하는 아이들, 학교는 민주시민이 되는 기본 과정을 경험하는 곳이다.
교과 진도는 밀렸지만, 후회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