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은 손맛큰시누이는 제규한테 비닐 장갑 끼지 말고, 양념을 버무리라고 했다. 자신의 동생(우리 남편) 닮아서 조카 손이 크다고 뿌듯해 하면서도 아직 '어린 손'이라서 아릴 것 같다고 걱정했다.
배지영
깍두기를 버무릴 때, 큰시누이는 비닐장갑을 끼려는 제규한테 처음으로 엄하게 말했다. 맨손으로 해야지 손맛이 난다고. 비닐장갑이 꼭 그렇게 깨끗한 건 아니라면서. 제규한테 "지네 아빠 닮아서 손은 겁나게 크네" 기특해하면서도 "저 어린 손, 아려서 어쩌냐"고 걱정했다. 그녀는 진짜 요리사는 치우면서 음식 하는 거라며 중간중간 부엌을 정리했다.
"무슨 수업이 그래요? 참 일관성이 없어. 제규한테 요리는 하지 말라면서 뭐 그렇게 자세하게 가르쳐요?"나는 큰시누이한테 항의했다. 그녀는 막 웃었다. 머쓱한지, 나보고 김치통 좀 찾자고 했다. 우리 집, 아주버님 집, 작은시누이 집, 큰시누이 집, 큰조카네 집, 수산리 부모님 집, 모두 해서 여섯 집. 깍두기와 생채를 각각 담아야 하니까 김치 통 12개가 필요했다. 늘 하는 소리, 큰시누이는 "가져가면 통 좀 가져와"라면서 김치를 나누어 담았다.
소파에서 낮잠을 주무셨던 아버지는 일어났다. 거동이 불편해도 방바닥을 닦고 다니던 어머니가 부엌으로 왔다. 큰시누이는 "엄마, 이거 제규가 담은 생채야. 먹어 봐요. 맛있게 됐어"라고 했다. 매운 걸 잘 못 먹는 어머니가 마다하지 않고 먹었다. 큰시누이는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온 아버지한테도 깍두기를 권했다.
"아빠, 손주가 담은 거니까 먹어 봐요. 양념은 진짜 잘 됐는데 무에 심이 들어있는 것도 있어. 그래도 맛있게 드세요." 4월 24일 일요일 오후, 특별한 건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제규와 큰시누이가 만든 생채와 깍두기를 싸들고 부모님 집을 나섰다. "저희 갈게요. 다음 주에 올게요"라고 인사를 했다. 어머니는 우리 아이들한테 "느 엄마 힘드니까 우애 있게 지내야 써"라고 했다. 아버지는 "그리여, 고맙다. 어서 가서 쉬어라"고 했다.
한 없이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듣고 계실 테니까5월 1일 일요일. 우리는 수산리(시가)에 갈 수 없었다. 군산의료원에 있었다. 아버지는 의식이 없었다. 나흘 전 아침에 하혈을 심하게 해서 입원한 상태. 발은 차가워져갔지만 혈색은 나쁘지 않았다. 밤늦게 문병 온 친척 어른이 "이러다가 좋아질 수도 있어. 금방 가시진 않아. 우리 어머니도 그러셨어"라고 경험을 얘기해 주었다.
5월 2일 오전 1시쯤. 시누이들이 "애들 학교 보내야지"라면서 우리 부부한테 자고 오라고 했다. 남편은 집에 오자마자 아이들 먹을 국을 끓이고 반찬을 했다. 나는 씻고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그때 작은시누이한테 "바로 와"라는 전화가 왔다. 아버지의 맥박과 심박이 느려지는 동안 우리는 아버지한테 한없이 고마웠던 마음을 전했다. 듣고 계실 테니까.
그날 오전 6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그 봄,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과 봄놀이를 가지 못했다. 서운해도, 화가 나도, "허허" 웃고 살아온 인생. 이웃들에게 5만 원을 희사하고는 거실에 있는 노래방 기계를 켰다. 흥겹게 노래를 불렀던 분이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도 꼬추가 떨어질 일이 없어"라면서 음식을 했던 아버지는 어머니를 두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