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셋톱박스 재고조사를 통해 월1회 재고조사 결산보고를 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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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하고 약 한 달간 스타일이 다른 선임과 일하면서 '노가다'만 해왔다. 그런 터라 선임이 서울 본사로 올라가고 내가 주도적으로 업무를 진행할 수 있게 됐을 때는 무척 기뻤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아직 미숙한 실무능력이 내 발목을 잡았다.
내게 처음 닥친 시련은 바로 '결산보고'였다. 내가 담당하는 업무는 우리 회사 창고와 협력사 창고 그리고 고객에게 서비스 중인 '셋톱박스'의 구매·재고관리 업무였는데 한 달에 한 번씩 전체 셋톱박스의 재고조사를 시행하고 결과를 보고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겨우 구매한 장비들을 ERP에 등록하고 협력사로 출고시키고 철거된 장비를 우리 회사로 반납시키는 일상 업무를 할줄 알게 됐는데 재고조사와 더불어 결산보고는 무리였다.
지난 달까지 선임이 해온 결산보고 품의서를 보면서 재고조사와 결과보고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연구했다. 하지만 이제 갓 입사 한 달이 조금 넘은 내게는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숙제였다. 각자 다른 분야의 업무를 하고 있는 팀원들이기에 마땅히 물어볼만한 곳도 없었다.
결국 서울에서 힘들게 적응하고 있을 선임에게 자주 전화를 걸어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그것도 중단해야 했다. 수화기 너머 들리는 선임의 귀찮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혼자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됐다.
그렇게 며칠 동안을 고민한 끝에 결산보고서를 완성했다. 선임이 지난 달에 결재를 받아놓은 품의서 양식을 재사용해 내용과 숫자만 바꿨다. 매달 현황을 보고 하는 자료라 계속 같은 형태로 보고돼온 것을 확인하고 내린 결론이었다. 그렇게 작성한 품의서를 가지고 팀장님께 결재를 받으러 갔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우리 회사는 사내 시스템을 이용해 전자결재를 받게 돼 있었다. 하지만 형식적인 절차였을 뿐, 사전에 오프라인으로 팀장님께 결재를 득한 뒤 시스템을 통해 전자결재 상신을 해야 했다. 출력을 해서 팀장님께 가지고 간 내 품의서는 온통 팀장님이 이리저리 써둔 메모들로 가득했고 '신입사원이 이렇게 서류 작업을 못하는데 선배들은 관심도 안 가지고 뭐하는 거냐'며 괜히 다른 선배들에게까지 불똥이 튀었다.
분명 내가 작성한 품의서는 지난 달까지 수 개월 동안 선임이 작성하고 우리 팀장님이 결재를 해온 품의서랑 똑같았다. 물론 내가 재고조사에 대한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팀장님의 지적사항은 내용의 문제가 아니었다. 품의서 작성 형태에 대한 지적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팀장님 자리 옆에 있는 조그만 원형의자(팀원들은 이 의자에 앉는 것을 싫어한다, 최소 2시간은 잔소리를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에 앉아 호되게 당하고 의기소침해져 창고로 돌아와 앉아 있을 때 부서에서 기획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선배가 올라와서 품의서 작성요령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결론이 먼저 나와야 한다, 마지막에 나와야 한다, 문단의 줄은 이렇게 맞춰야 한다' 등 팀장님이 좋아하는 문서의 구성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그 설명을 들으면서 나는 팀장님께 가져간 품의서가 지난 달까지 선임이 계속 문제 없이 결재받아오던 양식이라고 말씀드렸다. 그제야 선배는 나에게 '팀장님이 지금 신입사원 길들이기 하는 거야'라고 귀띔해줬다.
팀원들은 5만원이 넘는 고가의 LCD 필름을 함께 구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