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실빌딩 7층에 2개로 분리되어 있던 셋톱박스와 모뎀 창고를 6층에 통합하여 이사를 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내 책상이 마련됐다.
강상오
입사하고 한 달 보름이 지났을 무렵, 나와 스타일이 맞지 않던 내 선임은 서울 본사로 올라갔다. 아직 혼자서 업무를 처리하기엔 모르는 게 너무 많아 걱정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내가 주도적으로 불합리한 업무 프로세스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후련한 마음마저 들었다.
내가 입사하기 한두 달 전쯤 각 지역별로 있던 콜센터 인력들이 서울과 부산으로 통합되면서 콜센터가 있던 빌딩 6층 공간이 그대로 비워졌다. 때마침 창고로 사용하던 7층 공간의 임대계약이 만료되면서 창고를 콜센터가 있던 6층 공간으로 옮기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7층 창고는 2개의 방으로 분리돼 있었다. 내가 쓰던 셋톱실과 인터넷 모뎀류의 장비를 보관하던 창고가 그것이었다. 이 2개의 창고를 통합해 6층 공간으로 이동시키고 당시 모뎀류 장비를 관리하던 선배사원들을 나와 함께 근무하게 했다.
창고를 이사할 때 텅빈 6층 공간의 레이아웃을 어떻게 구성할지 논의하기 위해 앞으로 나와 함께 근무할 선배와 부서의 기획업무를 담당하는 선배를 만나 논의했다. 모뎀류의 장비들은 셋톱박스에 비해 부피가 작아 창고 공간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와 함께 창고를 사용할 선배는 레이아웃 구성을 하는 데 있어 내 의견이 적극적으로 반영되도록 배려해줬다.
창고 이삿날, 내가 소속된 팀의 구성원들은 모두 함께 시간을 내어서 모뎀 창고에 있던 장비들을 6층으로 다함께 옮기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평소 모뎀 장비들은 박스 넘버링을 통해 잘 관리가 되고 있었던 터라 한번에 이동해 새로 짜여진 선반에 넣고 기록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평소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셋톱박스를 창고 이사하면서 내가 관리하기 쉽도록 새로 정리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서울에 간 내 선임 덕에 창고에만 쳐박혀 살아서 한 달이 넘도록 팀원들과 대화 몇 마디 나눠보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런 내가 '시간 내서 나를 좀 도와 달라'고 이야기할 수 없었다.
결국 며칠에 걸쳐 조그만 손수레 한 대로 겨우 10대가량씩 정리한 셋톱박스 수천 대를 7층에서 6층으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장비 10대를 수레에 싣고 6층 창고로 내려와 바코드 리더기를 이용해 엑셀에 셋톱박스 시리얼 넘버를 스캔해서 입력하고 선반에 번호를 매겨 해당 장비가 몇번 선반에 있는지 엑셀 파일만 보면 알아볼 수 있도록 정리했다.
그렇게 수천 대의 셋톱박스를 일일히 내 손으로 정리하며 옮겨 나갔다. 며칠이 지나고 나서 창고 이사는 완료됐고, 내 PC에는 이 창고안에 있는 장비들의 위치가 모두 정리된 엑셀 파일이 하나 저장될 수 있었다.
창고 이사가 완료된 후 리모콘 수신율의 문제로 프론트 패널을 교체해야 하는 셋톱박스 목록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발생될 때마다 수시로 교체를 해서 A/S를 진행했으면 이렇게 많이 쌓이지 않았을 텐데, 이미 엄청난 수량의 셋톱박스가 프론트 패널 교체 대기 중이었기 때문에 이 상황을 팀장님께 정확히 보고를 하고 처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해당 문제로 쌓여있는 셋톱박스는 당시 대당 구매가로 단순 계산했을 때에도 억 단위가 넘는 금액이었다. 그 장비들을 빨리 수리해서 현장에 투입하면 그만큼 새로 구매하는 셋톱박스양을 줄일 수 있어 회사는 이일을 빨리 할 수록 이익이 되는 게 틀림 없었다.
나는 입사 후 처음으로 내 스스로의 판단으로 내가 해야할 일에 대해 계획하고 정리해서 팀장님께 보고했다. 내 보고를 받은 팀장님은 그제야 창고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상황을 파악하고는 이 업무에 관심을 두고 지원해주시기 시작했다.
내가 혼자서 감당하기엔 너무 많은 양이라고 생각하셨는지 팀장님은 나와 함께 근무하게 된 선배사원에게 내 업무를 '함께 봐주라'는 지시와 함께 관리부서에 요청해 프론트 패널 교체일을 전담으로 맡길 아르바이트 사원을 뽑아달라고 요청했다.
이렇게 나는 밀린 일들에 나름대로의 우선 순위를 매겨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고 불합리 하게 운영됐던 업무 프로세스들을 하나씩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기존의 프로세스에 적응되었던 협력업체와 관련부서 사람들의 불편 민원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회사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이익이 되고 업무가 좀 더 효율적으로 될 수 있는 일이라 판단되면 그 논리를 이해시키고 협의하며 조금씩 주도적인 업무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꼭두각시 로봇처럼 지내던 지난 두 달간의 설움을 깨고 드디어 나의 색깔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장 뛰쳐나가고 싶던 내 마음도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그리고 업무가 하나씩 정리되면서 내 퇴근시간도 보통의 직장인들처럼 조금씩 빨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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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획과 콘텐츠 제작을 주로 하고 있는 롯데자이언츠의 팬이자 히어로 영화 매니아, 자유로운 여행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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