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책 표지
은행나무
크고 화려한 것들의 세상이다. 큰 것은 더욱 커지고 화려한 것은 갈수록 화려해진다. 폴리스는 메트로폴리스가 되고 미디어는 매스미디어가 됐다. 성공한 음식점은 체인이며 프랜차이즈가 되고 사람들은 이미 사람들이 많은 거리로 향한다.
도심 곳곳 광고판에는 인기 많은 스타가 더욱 큰 관심을 구하고 섰다. 커다란 영화에 더 많은 관객이 들고 예쁘고 잘 생긴 남녀에겐 구애의 손길이 끊이지 않는다.
반면 작고 질박한 것들은 설자리를 점점 잃는다. 작고 질박한 것들에겐 작고 질박하게 남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다.
다양성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들 하지만 실상은 다양성이란 말 자체를 지키기도 급급하다.
많은 가수가 하나의 창법으로 노래를 부르고 많은 작가는 하나의 스타일로 글을 쓴다. 거리엔 비슷한 차림의 사람들이 수두룩하고 식당이며 카페는 저마다 비슷한 맛을 내는데 열중한다. 도시는 더 큰 도시와 합쳐지거나 더욱 작아지거나 둘 중 하나다. 사람도 더 크고 화려해지거나 더 작고 초라해지거나 둘 중 하나다. 크고 화려한 것들의 세상이다.
내년이면 등단 50주년을 맞는 윤후명은 평생을 작고 질박한 것들 사이에서 글을 써온 작가다. 그는 시적인 문체로 도무지 소설인지 수필인지 이도저도 아닌지 확인할 길 없는 독특한 글을 쓴다. 대체 이런 작품을 소설이랍시고 내놓는 작가를 나는 그 말고 더는 알지 못한다. 요컨대 형식을 탈피해 자유로운 글을 쓴다는 것인데 내용만 다를 뿐 비슷비슷한 경향성을 내비치는 많은 작가들 사이에서 그가 특별한 이유다.
<강릉>은 등단 50주년을 앞두고 윤후명이 내놓은 전집 첫 번째 권이다. 작가 자신의 고향인 강릉을 모티브로 삼은 신작들과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작 '산역'을 함께 묶었다. 흔히 연대순으로 편찬하는 소설 전집의 경향이며 관행을 깬 것인데 이 역시 윤후명이란 작가의 색채를 드러낸다.
강릉, 그것도 오늘의 강릉에선 잊힌 지 오래일 옛 설화를 모티브로 한 그의 소설은 크고 화려한 글에 익숙한 많은 독자들에게는 생소할 게 분명하다. 더욱이 데뷔작격인 '산역'과 근래에 쓴 다른 작품들 사이의 커다란 격차는 과연 윤후명이란 작가가 평생에 걸쳐 무엇을 지향해 왔는지를 애매하고 모호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그의 소설을 읽는 이유는 크고 화려한 것들의 세상에서 만나는 작고 질박한 것의 감동에 있다. 오늘날 대체 어느 작가가 호랑이가 처녀를 잡아먹고 머리만 바위 위에 놔뒀다는 기이한 설화를, 잊혀 이제 기억하는 이조차 몇 남지 않은 설화를 모티브 삼아 여러 편의 소설을 쓰겠는가. 대체 누가 북방 알타이 지역에서 온 젊은이를 매개로 민족의 뿌리라 할 만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나 말이다.
윤후명 전집 첫 번째 권, <강릉>이 지닌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민음사, 2013
강릉
윤후명 지음,
은행나무, 2016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비채,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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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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