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강남역 인근의 건물 공용화장실 '여성 살인사건' 피의자 김모(34)씨가 살인사건 현장 검증을 모두 마치고 경찰호송차량으로 이동하고 있다.
최윤석
더욱 심각한 문제는, 경찰이 무리하게 '묻지마 범죄론'을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범인에게 사실상 면죄부를 줬다는 점이다. 형법 제10조는 "심신장애로 인하여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자의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별력이나 의사결정 능력이 전혀 없는 '심신상실' 상태일 경우는 무죄를, 그런 능력이 부족한 경우는 형을 감경하게 되어있다.
결과적으로 경찰은 '여성 혐오'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성급한 결론을 내렸고, 그로 인해 재판도 시작되기 전에 범인을 변호하는 꼴이 되었다. 물론 경찰은 '심신상실 또는 심신미약이라고 무조건 형을 줄여주지는 않는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심신상실이나 심신미약 상태에서 범행했다고 판단하면서 일반인과 동일한 형을 선고하는 것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법정신에도 위배된다.
10조 3항("위험의 발생을 예견하고 자의로 심신장애를 야기한 자의 행위에는 전 2항의 규정을 적용하지 아니한다")에 해당하는 상황, 즉 심신 미약 상태임이 분명하나, 범인이 스스로 그런 상태를 만든 경우가 아니라면 형의 감경은 불가피하다. 만일 그에게 '심신상실'이나 '심신미약' 상태를 배제하는 판결을 내린다면 그가 일정한 변별력을 가진 상태에서 범행했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스스로 '여자가 무시해서 죽였다'고 말한 만큼, 범행 동기에서 '여성혐오'를 배제할 수 없게 된다.
경찰은 이번 사건에서 '혐오'의 요소를 배제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기본적으로 불가능한 시도였고, 법적, 논리적으로 모순적이며, 사회적으로도 큰 손실을 끼친 무리수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보여준 것은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키는 '국민의 보호자'의 모습보다는, 사건이 정부에 부담을 주지 않게 온몸으로 막아서는 '정권 수호자'의 모습이었다.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부랴부랴 '여성혐오'를 지우려고 애쓸 일이 아니었다. 이 사건이 한국 여성들에게, 한국 남성들에게, 한국 사회 전체에 어떤 함의를 갖는지 더 많이 토론하고, 여성혐오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한다면 우리가 사는 곳은 더욱 안전하고 건전한 곳이 될 터이다. 경찰과 더불어 '혐오범죄가 아니라 묻지마 살인'이라는 주장을 '공유'하는 언론과 정부·여당 역시 비난받아 마땅하다. 어떻게 이들은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할까?
'묻지마 범죄'라면서 '여성상대 범죄 대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