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톱박스내가 담당할 업무는 디지털 케이블 방송 수신기인 셋톱박스 구매,재고관리 업무였다
pixabay
신입사원 개개인들에게는 '멘토'가 지정된다. 멘토는 각자가 맡은 신입사원들이 회사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OJT 기간 일주일 중 4, 5일 차에는 현업 부서에 배치를 받아 멘토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데 내 멘토는 내가 담당할 업무를 미리하고 있던 선배 사원이 지정되어 있었다.
나의 멘토이자 선임이었던 분은 이미 서울 본사로 발령이 나 있는 상태였다. 앞으로 한 달 뒤면 서울에서 근무를 해야 했기 때문에 다른 신입사원들보다 나는 서둘러 업무를 인수인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처음엔 너무 일찍, 난생처음해보는 업무를 한 달 만에 배울 수 있을지 걱정 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선임의 업무 스타일은 나와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고 빨리 혼자서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소속된 부서는 기술부서였다. 기술부서에서는 케이블 방송의 송출을 담당하는 방송기술과 각 가정에 신호를 공급하기 위한 네트워크망 관리 그리고 가입자들의 집에 설치하는 셋톱박스와 모뎀과 같은 장비를 관리하는 장비관리 총 3가지 직군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장비관리 업무는 몇달전까지 존재했었던 고객서비스팀에서 진행하는 업무였다고 한다. 하지만 각 지역 방송국별로 나뉘어져 있던 콜센터가 서울과 부산으로 통합되면서 콜센터 직원들이 주를 이루던 고객서비스팀이 없어졌다. 그리고 장비관리 업무는 각 지역 방송국의 기술부서로 이관되었다.
OJT 4일 차에 내가 담당할 업무를 처음으로 배워보기 위해 멘토를 만나러 건물 7층으로 올라갔다. 7층은 회사에서 '셋톱실'이라고 부르는 창고였다. 여기는 지금까지 봐온 3, 4, 5층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의 환경이 펼쳐져 있었다. 3, 4, 5층은 너무 깨끗하고 멋스러운 인테리어가 돼 있는, 대기업 다운 환경의 회사였다면 7층은 내가 근무해온 중소기업 공장환경보다 훨씬 더 열악한 환경의 창고 그 자체였다.
하나도 정리가 되지 않고 여기저기 쌓여있는 셋톱박스들과 바닥에 널부러진 박스들. 그 짐들 사이를 비집고 안쪽 창가에 가니 낡은 책상 2개가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중 1개의 책상에 내 선임이 혼자 앉아서 일을 하고 있었다. 깨끗하고 멋스러운 라운드 책상과 파티션으로 보기 좋게 만들어져 있던 4층 사무실과는 완전 다른 세상이었다.
난생처음으로 대기업 사원이 되었다는 사실에 너무 좋았다. 7년간의 타지 생활을 마치고 외롭게 혼자 지내던 어머니와 함께 지낼 수 있다는 사실도 좋았고, 따뜻한 집밥을 먹고 다닐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했다. 대신 지난 7년간 쌓아온 나의 커리어는 이 회사에 입사하면서 모두 버려야 했다. 업종이 다르다고 경력을 하나도 인정 받지 못했고 대학은 아직 재학 중이라 고졸 신입 처우를 받고 입사를 했기 때문이다.
지난 7년간 중소기업이었지만 또래들에 비해 아주 빠른 승진과 연봉 인상을 경험했었다. 하지만 그 마저도 이 회사에 입사하면서 모두 내려놓아야만 했다. 내 입사 연봉은 이전 직장에서 받던 연봉보다 훨씬 더 적었다. 그래도 집에 내려올 수 있다는 것, 대기업 사원이 된다는 것에 위안을 삼으며 기쁘게 타지 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내가 근무할 곳과 해야할 일들을 내 눈으로 보는 순간 '아차' 싶었다. '내가 너무 앞뒤 재보지 않고 여기에 온게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여기가 만약 내가 살고 있던 타지였다면 빨리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어머니는 아들이 집에 돌아온것에 너무 기뻐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박스 먼지 가득한 7층 창고 낡은 책상에 앉아 키보드 알이 하나 빠진 노트북으로 사내 전산 시스템을 통해 셋톱박스를 협력업체로 출고 시키는 방법을 선임에게 배우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내가 여기에 계속 다녀도 되는것일까? 그래 딱 일주일만…'이라고 마음을 먹고 본격적으로 업무 인수인계를 받기로 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1
레드콘텐츠 대표
문화기획과 콘텐츠 제작을 주로 하고 있는 롯데자이언츠의 팬이자 히어로 영화 매니아, 자유로운 여행자입니다.
<언제나 너일께>
<보태준거 있어?>
'힙합' 싱글앨범 발매
<오늘 창업했습니다>
<나는 고졸사원이다>
<갑상선암 투병일기>
저서 출간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