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준비집으로 내려가기 위해 옷가지와 식기들을 박스에 포장해서 택배로 보낼 준비를 했다
강상오
지난 2007년 여름이 거의 끝나갈 무렵, 기대하지 않았던 대기업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면접을 보러 경남 김해에 내려갈 때에도 어머니께 왔다 간다는 말도 못하고 올라왔는데 최종 합격하고 집으로 내려간다는 소식을 전해드리니 너무 좋아하셨다. 하지만 나는 오랜 시간 구미 생활에 적응을 하고 살아온지라 다시 집으로 내려갈 생각을 하니 조금은 걱정도 됐다.
합격 통보를 받고 며칠이 지나 한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그 대기업 인사시스템에서 보내진 서류전형 불합격 통보 메일이었다. 나는 면접까지 보고 최종 합격 전화까지 받았는데 이게 뭔가 싶어 인사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된거냐 물으니 받은 메일은 무시하면 된다고 했다. 이 때부터 뭔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합격 통보를 받고 일주일이 넘게 지났는데 언제부터 출근하라는 말이 없었다. 입사예정일자가 나와야 그에 맞춰서 살고 있는 원룸을 빼고 집으로 이사를 할 텐데 연락이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인사시스템에서 날아온 서류전형 불합격 메일 때문인지 혹시라도 입사가 취소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작정 집으로 내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답답한 2주간의 시간이 흘렀다. 참다 못해 다시 인사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입사 예정일이 언제냐고 물었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다음주 월요일'이었다. 합격 통보를 받은 날, 나는 타 지역에 살고 있고 이사를 가야 하기 때문에 꼭 미리 입사 예정일을 알려달라고 했는데 내가 전화를 걸어 확인한 그제서야 당장 다음주부터 출근하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갑작스러운 입사 통보에 난감했다. 그리곤 이내 정신 차리고 이사 준비를 했다. 원룸에 있는 물건들은 대부분 '옵션'들이었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가야할 짐들은 식기들과 옷가지, 컴퓨터가 전부였다. 조그만 원룸 안에 짐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냐고 생각했는데 하나 하나 짐을 싸다 보니 그 양은 엄청났다.
이사 준비를 하기 위해 이전 직장에서 거래하던 박스 회사 부장님께 전화를 걸어 종이박스를 좀 달라고 부탁했다. 부장님은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나왔지만 같은 고향에서 올라온 동생이라고 잘 대해주셨다. 그렇게 종이박스 몇 개를 얻어 짐을 쌌다.
짐을 다 싸놓고 보니 내 조그만 승용차에는 다 실을 수 없을 정도의 양이었다. 그렇다고 이삿짐센터를 부를 정도의 양도 아니었기에 택배를 이용하기로 했다. 컴퓨터와 몇 가지 귀중품은 내가 직접 챙기고 나머지 옷가지들과 식기들은 택배를 이용해 집으로 발송했다. 택배를 보내고 내가 집에 내려가 있으면 다음날 짐이 도착하기 때문에 혼자 살던 내가 이사하기에는 딱 좋은 방법이었다.
정들었던 내 방을 나와서 집으로 내려가는 길. 매번 오가던 길이었지만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감정이 복받쳤다. 지난 몇년간 살아온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내 감정선을 건들였다. 힘든 일도 많았지만 또 행복한 일도 많았던 곳. 많은 추억과 친구들을 남겨둔 채 이제는 내 고향과도 같은 이 곳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집에 도착하니 맛있는 음식 냄새가 진동을 했다. 어머니는 늦둥이 막내 아들이 몇 년 만에 다시 집으로 내려온다는 소식에 너무 좋아하셨다. 어머니가 기뻐하는 모습에 나도 기분이 좋았지만 오랜 세월과 함께 어색해져 버린 우리집과 내 방이 낯설어 적응하기 힘들었다. 이 집은 내가 구미로 올라갈 때 살던 집이 아니라 중간에 이사를 한 집이라 그런지 더욱 그랬다.
가져온 짐을 풀기 위해 내 방으로 들어갔다. 몇 달에 한 번씩 집에 내려올 때면 침대에서 잠만 자고 다시 올라가곤 했던 방이다. 이제서야 제대로 돌아본 내 방은 아직도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쓰던 방 그대로였다. 내가 지방으로 올라가고 나서 이 방의 세월은 멈춘 것이었다. 그런 방을 어머니는 매일 쓸고 닦고 하셨던 거다.
구미에서 택배로 보낸 물건들이 집에 도착했다. 짐들을 풀고 방을 내가 지내기 좋은 상태로 만드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 그렇게 6년간 멈췄던 내 방의 시간은 다시 흘러가게 되었고 어머니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동안 텅빈 집안에서 외롭게 혼자 지내셨을 어머니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머니와 나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가족이지만 몇 년 동안을 혼자 살다가 누군가와 한 집에서 함께 지낸다는 사실이 어색했다. 어색했다기보다는 불편했던 것 같다. 거기다 한동안 구미에 대한 향수병까지 걸려서 몇 달을 고생했다.
부산이 고향이던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면서 김해로 이사를 오게 됐다. 김해에서 부산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니다 보니 생활권이 항상 부산에 있었다. 그러다 지방으로 취업을 나갔기에 김해는 내게 있어 연고가 없는 동네였다. 그런 상태에서 집에 내려와 김해에서 살게 됐으니 혼자 살다 어머니랑 함께 사는 것도, 친구 하나 없는 낯선 동네에서 사는 것도 모두 힘들었던 것 같다.
구미에 대한 향수병으로 거의 한 달에 2번 정도는 주말마다 구미에 올라가 친구들을 만났다. 고속도로를 달려 구미 근처에 다다르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딘가 멀리 여행을 갔다가 집에 다시 돌아왔을 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향수병을 극복해야 하는데 지독하게도 그 병은 몇 달 동안 계속됐다.
출근시간 6시 30분... 방송국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