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박물관에서 떠들어도 되는 이유

[우리 가족의 베네룩스 여행기 ⑦] 암스테르담의 랜드마크, 고흐 미술관과 국립 박물관

등록 2016.02.18 15:53수정 2016.02.18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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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옆 도서관 박물관은 대개 도서관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관람객들도 자유롭게 도서관을 둘러볼 수 있을 만큼 개방적이다.
박물관 옆 도서관박물관은 대개 도서관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관람객들도 자유롭게 도서관을 둘러볼 수 있을 만큼 개방적이다.서부원

소풍이든 수학여행이든 요즘엔 예전처럼 학년 전체가 한 곳으로 모여 가는 학교는 드물다. 교육부나 교육청이 권장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부러 소규모 학급별로 주제를 정해 가는 것이 시나브로 대세가 됐다. 그러다 보니 계획할 때부터 학생들의 의견을 모으고, 다녀와서는 각자 학급 블로그에 사진이나 글을 올리거나 문집을 따로 만드는 등 후속 작업이 이뤄지곤 한다.

그런데, 소풍 장소를 정할 때부터 담임교사는 아이들과의 실랑이를 각오해야 한다. 교육적인 효과를 우선 고려해야 한다는 교사와 학교 밖 활동만이라도 즐거워야 한다는 학생의 '밀당'은 웬만해서는 그 간극이 좁혀지지 않는다. 여하튼 둘 모두를 충족시킬 수 있는 장소를 쉽사리 찾을 수 없는 한계를 매번 절감하게 된다. 말하자면, '의미'와 '재미'의 충돌이라고나 할까.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풍 장소는 단연 놀이공원이다. 굳이 설문조사를 할 필요가 없을 만큼 압도적이다 못해 광적이다. 소규모 학급별로 소풍을 계획하고, 아이들의 의견을 묻게 된 때부터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었다. 심지어 사나흘간의 수학여행 때도 어떤 주제와 장소로 가든 중간엔 반드시 반나절쯤 놀이공원 코스가 들어있어야 아이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곳은 어디일까. 산이 첫 번째고 두 번째는 늘 박물관이다. 놀이공원이 그러하듯 이 또한 예외가 없다. 놀이가 인터넷 게임과 동의어고, 몸 움직이는 것조차 꺼려하는 아이들이 태반일진대 한참을 땀 흘리며 올라야 하는 산을 기꺼워할 리 없다는 건 이해 못할 바 아니다. 나의 학창시절엔 김밥과 음료수를 챙겨 산에 걸어 오르는 것이 곧 소풍이었는데, 요즘 아이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라치면 '꼰대' 소리 듣기 십상이다.

산은 그렇다 쳐도, 대체 박물관을 싫어하는 건 무엇 때문일까. 물어보면 아이들은 십중팔구 '재미없다'고 답한다. 몇 해 전에는 박물관으로 소풍을 가려면 차라리 교실에서 수업을 하자며 반발하는 아이도 있었다. 개중에 박물관이 괜찮다는 아이도 '빨리 끝나서 좋다'고 심드렁하게 말할 뿐이다. 그들은 파하자마자 곧장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피시방에 달려가게 될 것이다.

소풍 장소를 정하려다 아이들과 실랑이를 벌였던 기억이 갑자기 되살아난 까닭은 암스테르담의 고흐 미술관과 국립 박물관에서 만난 이곳 또래 아이들의 모습과 겹쳤기 때문이다. 평일 일과 중 박물관을 찾은 아이들의 진지한 태도와 열정적으로 강의하는 교사의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소풍 나온 걸까, 아니면 체험학습을 온 걸까. 아무튼 아이들은 하나같이 딱딱한 박물관을 교실이자 놀이터로 여기는 것 같았다.

박물관에서 수업하고 토론하는 네덜란드


미술관 견학을 온 초등학생들 유난히 학생 관람객들이 많았는데, 질문과 답변이 이어지면서 전시실 안팎이 적잖이 소란스러웠다.
미술관 견학을 온 초등학생들유난히 학생 관람객들이 많았는데, 질문과 답변이 이어지면서 전시실 안팎이 적잖이 소란스러웠다.서부원

캄캄한 밤에 도착할 줄 뻔히 알았으면서도 암스테르담의 숙소는 기차역 근처가 아닌 국립 박물관과 가까운 곳으로 잡았다. 사실 낯선 도시를 지도 한 장에 의지한 채 그것도 밤에 도착해 숙소를 찾아간다는 건 설레기보다 두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애써 국립 박물관 주변을 고집한 까닭은 아침 일찍 서두르지 않으면 입장이 쉽지 않을 거라는 인터넷 블로거들의 조언 때문이었다.

특히 국립 박물관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고흐 미술관은 입장권을 끊기 위해서 한두 시간 줄 서는 건 기본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 까닭에 여행을 떠나기 전 인터넷을 통한 예약은 필수고, 예약자들조차 줄을 서야 하는 진풍경이 벌어진다고도 했다. 대체 얼마나 진귀한 볼거리가 있기에 그럴까 싶었다. 고흐 미술관과 국립 박물관, 이 두 곳만으로 하루 일정이 채워졌다.


그렇잖다 해도 어느 도시엘 가든 우리 가족이 맨 먼저 찾는 곳은 그 지역의 박물관이다. 박물관은 현지인들의 과거와 현재의 생활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기에, 호불호를 떠나 마땅히 여행자들이 맨 먼저 찾아가야 할 곳이라 여전히 믿고 있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 박물관을 찾는다는 건 이방인 여행자가 낯선 도시와 마주하는 첫 번째 의례 행위, 곧 방문 인사다.

다행히도 막상 도착해 보니 평일인데다 가랑비 뿌리는 추운 날씨 탓인지 비교적 한산했다. 덕분에 느긋하고 편안하게 고흐를 만끽할 수 있었다. 고통스러웠던 고흐의 짧은 생애를 보상이라도 하듯 미술관은 세련됐고 풍요로웠다. 각 층을 오르며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순탄치 않았던 그의 삶이 저절로 포개진다. 극단적인 색의 대비와 강렬한 붓 터치가 가슴을 뛰게 했다.

고작 서른일곱 해를 살았지만, 그가 남긴 작품은 900여 점에 이른다고 한다. 그중 절반가량이 이곳에 전시되어 있고, 나머지는 파리와 뉴욕 등 전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관람객을 모으고 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을 내건 미술관이 모국의 수도인 이곳에 따로 세워진 것도 그렇듯 엄청난 양 때문인 듯하다. 그가 그린 '자화상'만도 십여 점에 이르다보니 미술관 내에 자화상만 모아놓은 전시실이 따로 있을 정도다.

고흐 외에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들인 렘브란트와 베르메르, 할스, 아베르캄프 등이 남긴 걸작들은 이웃한 국립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국립 박물관은 지어진 지 200년도 넘은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두 차례 세계대전의 참화도 굳건히 견뎌낸 곳이다. 소장된 작품들의 수량과 권위뿐만 아니라 건물 그 자체로도 위대한 예술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박물관에서의 '미술 수업' 모습 렘브란트의 작품들 앞에서 교사의 열정적인 강의를 경청하고 있는 고등학생의 모습. 직후 관람객 중 한 사람이 끼어들고 학생들이 가세하며 격렬한 토론의 현장으로 바뀌었다.
박물관에서의 '미술 수업' 모습렘브란트의 작품들 앞에서 교사의 열정적인 강의를 경청하고 있는 고등학생의 모습. 직후 관람객 중 한 사람이 끼어들고 학생들이 가세하며 격렬한 토론의 현장으로 바뀌었다.서부원

국립 박물관은 이름만 박물관이지 사실상 미술관이다. 고흐 미술관이 19세기 후반을 살다간 그의 생애에 맞춰 작품들을 현대적 감각을 살려 전시하고 있다면, 국립 박물관은 네덜란드의 역사를 미술 작품을 통해 개괄하려는 듯 시대 순으로 배열해 놓았다. 고흐 미술관이 강렬한 색채로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면, 국립 박물관은 엄청난 규모와 작품의 크기로 그들을 압도한다.

두 곳 모두 세계적으로 내로라는 걸작들이 즐비한 곳이지만, 사진 촬영도 비교적 자유롭고 요소요소마다 관람객의 행동을 통제하는 직원들도 많지 않아 언뜻 전시된 작품이 모두 복제품인가 의심될 정도다. 더욱 놀라운 건 전시실마다 관람객들끼리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로 시끄럽다는 것이다. 우리의 상식에 비춰보면,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행태 아닌가.

그러나 작품을 독점하듯 바로 앞에 서서 가리지만 않는다면, 무얼 하든 다들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눈치다. 오디오 가이드를 귀에 꽂은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 법도 하건만, 되레 그들 중에는 오디오 가이드를 벗고 다른 사람들의 대화에 끼어들어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곁에 서 있던 직원조차 소란스러운 그들을 굳이 제어하지 않았다.

더욱이 전시실을 옮겨 다니며 아이들을 앉혀놓고 숫제 강의를 하는 교사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앞 다퉈 질문하는 초등학생들부터 교사의 설명을 주의 깊게 경청하는 고등학생들까지 그야말로 '미술 수업'이 한창이었다. 스마트폰을 이용해 다양한 각도에서 사진을 찍는가 하면, 교사의 설명을 수첩에 열심히 받아 적는 아이도 있었다.

국립 박물관 2층 렘브란트의 작품들을 전시한 곳에서 한 관람객이 고등학생들의 수업에 끼어드는 모습을 보았다. 교사에게 질문하려는 게 아니라, 작품에 대한 색다른 해석을 아이들에게 들려주려는 듯했다. 급기야 아이들 앞에서 교사와 토론하는 장면이 연출됐다. 아이들은 고개를 돌려가며 그들의 '배틀'을 지켜봤고, 무언가 계속 질문을 던지며 그 토론에 함께하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대화 내용을 잘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게 그저 답답할 지경이었다.

어린 아이들 일상과 함께하는 박물관과 미술관

암스테르담 상징 조형물 고흐 미술관과 국립 박물관 사이에 세워놓은 알파벳 조형물로, 비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인증샷'을 찍으려는 여행자들로 북적였다. 뒤로 보이는 것이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국립 박물관이다.
암스테르담 상징 조형물고흐 미술관과 국립 박물관 사이에 세워놓은 알파벳 조형물로, 비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인증샷'을 찍으려는 여행자들로 북적였다. 뒤로 보이는 것이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국립 박물관이다.서부원

만약 우리네 박물관이었다면 어땠을까. 대학입시를 코앞에 둔 마당에 박물관을 찾아 공부하러 온 고등학생들을 만나기도 쉽지 않았을 테지만, 전시실 안에서 작품을 두고 토론이 진행된다는 건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시끄럽다고 쫓겨나지 않으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박물관과 미술관이 어린 아이들의 일상 속에까지 깊이 뿌리내려 있음을 실감하는 계기가 됐다.

안타깝게도 고흐의 대표작인 '해바라기'는 보질 못했다. 현재 장기 보존 처리 중이라는데, 내달 24일에 다시 전시될 예정이라고 한다. 또, '빈센트'라는 명곡의 배경으로 유명한 작품 '별이 빛나는 밤'도 정말 보고 싶었는데 없었다. 알고 보니 대서양 건너 뉴욕 현대 미술관이 소장 중이란다. 그렇지만 아쉬울 건 없다. 교사로서 그보다 몇 배는 더 강렬한 깨달음을 얻었으니 말이다.

국립 박물관과 고흐 미술관 사이에는 암스테르담을 소개하는 여행안내서의 표지마다 등장하는 독특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도시의 이름을 재해석해 디자인한 창의성이 돋보이는데, 암스테르담을 찾은 여행자라면 이곳에서 예외없이 '인증샷'을 남기게 된다. 그들은 사진을 확인하며 흰색과 빨간색 알파벳이 푸른 잔디가 깔린 공원과 고풍스러운 주변 건물과 대비되어 잘 어울린다고 말한다.

그 기발한 상징물을 하필이면 국립 박물관과 고흐 미술관 사이에 세워놓은 이유가 궁금해졌다. 암스테르담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네덜란드 왕궁이나 기차역, 시청 근처가 최적의 입지일 텐데 말이다. 꿈보다 해몽이라지만, 어릴 적부터 박물관과 미술관을 제 집 드나들 듯이 하며 길러진 예술적 감성의 결과물이 바로 이것이라며 짐짓 뽐내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고흐 미술관에 들어갈 때도, 오후 국립 박물관을 나왔을 때도,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그 조형물 앞은 카메라를 든 여행자들로 인산인해였다.
#베네룩스 #고흐 #렘브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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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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