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총선에 출사표를 던진 오성규 전 서울시 시설관리공단 이사장.
정대희
- 총선에서 자신이 가진 최대 경쟁력은 무엇이라고 보나? "짝수(2016년) 총선 때에는 항상 새로운 인물로의 후보 교체 요구가 많았다. 난 기득권에 얽매이지 않는 정치 신인이다. 80년대에는 민주주의를 쟁취하려는 시대 흐름에 동참했고, 직장생활도 했다. 17년 동안 시민운동을 하면서 서민들의 요구를 귀담아 듣는데 단련됐다. 또 행정경험도 갖고 있다."
- 국회에 들어간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나?"청년 정치를 복원하고 싶다. 2010년에 시민사회단체 인사들이 '신신사유람단'을 구성해 유럽과 미국의 시민정치를 견학했는데, 대학생들이 미국 진보를 위해 토론하고 대안을 생산해서 정치에 반영하는 '캠퍼스 프로그레스'가 인상적이었다. 스펙 쌓기와 먹고사니즘으로 내몰린 우리 시대 젊음의 시간을 미래가 있고 꿈을 키워나갈 수 있는 삶의 시간으로 바꾸는 정치가 필요하다."
그는 환경운동을 해왔다. 그가 최근 주목하는 주제는 작년 12월12일에 체결된 파리 협정이다. 그동안 기후변화협약에서 빠지려고 애쓰던 선진국 대표 미국과 개도국 대표 중국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2020년부터 적용될 파리협약은 어마어마한 국제 질서, 즉 경제, 사회, 문화 질서를 규정하는 협약인데 우리사회는 전혀 준비를 못하고 있다"면서 자기 전공을 살려 "정치 영역에서 에너지 정치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싶다"고 말했다.
시민운동 최전선이번에 정치 초년생으로 입문한 그는 젊은 시절 한 때 잘나가는 샐러리맨이었다. 현대중공업 해외기술 파트에서 일했을 때에는 "총각으로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월급을 받았다"고 했다. 연봉 2500여만 원선. 95년 경실련 환경개발센터에 입사할 때의 월급은 50만원. 그 마저도 6개월 뒤부터 일정 기간 동안 받지 못하고, 300만원 마이너스 통장으로 버텼다고 한다.
"현대중공업에 다닐 때 인사동 포장마차에서 고갈비에 소주를 먹는데, 옆에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 학원 보내는 문제, 입시 걱정, 17평 아파트에서 32평 아파트로 이사했다고 좋아하는 모습들... 그런 삶도 의미가 있겠지만, 내가 그런 선택을 하기엔 마음이 편치 않았다."- 후회하진 않았나? "힘이 들었지만 하고 싶었던 일이었기에 즐거웠다. 단, 2000년대 중반에 시민운동 위기가 찾아왔는데, 함께 일했던 선후배들이 시민운동판을 떠나는 것이 안타까웠다. 능력 있는 친구들이었는데 세상을 바꾸자는 꿈을 이어가지 못하는 게 가슴 아팠다. 그 때 결심했다. 시대적 요구를 수렴하고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시민운동을 해야겠다고."
그 뒤 그는 환경정의 사무처장, 에너지 복지센터 대표이사,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 서울시민햇빛발전협동조합 집행위원장 등을 거치면서 시민운동의 최전선에서 뛰었다.
- 시민운동의 성과로 내세울만한 게 있다면?"90년대 말과 2000년 초에 개발 광풍이 불었다. 관료와 개발업자, 토건회사, 즉 '난개발연대'의 힘이 엄청나게 셌다. 이에 저항해서 용인 죽전 택지개발 반대운동을 벌였고 이를 막았다. 대중들의 지지를 업고 한 운동이었기에 가능했다. 그 전만해도 환경운동 범주에는 쓰레기 줄이기 등 생활문화 운동이 중심이었는데, 도시와 난개발 문제로 확장시켰다. 지금은 보편화된 어린이들의 건강권 등도 환경정의가 앞장서 개척한 영역이다."
한 때 낙하산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