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눈물> 후원자에게 보낸 <소년원의 봄>
조호진
<소년원의 봄>(도서출판 삼인). 가끔 막걸리를 함께 섞어 마시던 그가 시집을 냈다. 아주 오랜만에 펴든 시집을 몇 장 넘기다가 난, 숨이 멎었다.
혼자 푸르면숲이 될 수 없다.
(조호진 시인의 '숲' 전문)
진리는 한 문장이다. 단순명쾌하다. 이걸 압축한 건 기술이 아니라 시인의 삶이다. 혼자 발버둥을 치면서 온갖 곁가지를 쳐낸 뒤에 얻은 깨달음. 더불어 살겠다는 다짐이자 선언이다. 그는 누군가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헐벗은 나무들. 하지만 희망 한 톨을 꽉 움켜쥔 사람들.
탈출 조호진(55) 시인. 그는 이력부터 간단치 않다. 1960년 서울 영등포 피난민촌에서 출생했다. 1부 '시인의 삶'에 언뜻언뜻 어린 그의 그림자가 내비친다.
"어머니가 가출했다./아버지가 기다린 것은/아내보다 육성회비였다./육성회비 체납자인 아들은/수업 중에 교실에서 쫓겨났다./여관 조바로 돈을 번 아내는/남편 몰래 육성회비를 보냈지만/아버지를 찾아오진 않았다. 대신에/노점 단속반이 예고 없이 들이 닥쳤다/(중략)/아버지의 입이 돌아갔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으리/다짐했는데 아버지처럼 입이 돌아갔다. 쉰둘이었다." (구완와사 1)
그와 나는 6호선 오목교역 앞에서 막걸리를 섞어 마셨다. 술이 몇 순배 돌자 그는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영등포 피난민 촌이 철거되며 이주한 안양천 뚝방 동네 판자촌, 겨울에는 칼바람을 간신히 피하는 거적때기 판자촌이 바로 오목교역 근처였다고. 그때 그는 가리봉에서 이주노동자 돕는 일을 했다. 시인의 어린 시절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었다.
"그냥 퍼준 건 밥이고/가득 퍼준 건 정입니다./산 목숨 버릴 수 없어 얻어먹는/식판 밥은 아무리 먹어도 허기집니다." (무료급식소에서 1)
육성회비 상습 체납 학생이었던 시인은 남도의 야간 공고를 졸업한 뒤 선원과 공사판 잡부, 프레스공으로 일했지만 갇혔다. 서울 구로공단 노동자와 날품팔이 노동 현장. 가난한 노동은 그를 한없이 옥죄었다.
"기습 한파가 몰아치면서/수도관과 계량기가 동파되고/지하 배관과 전선마저 얼어 붙었다.//얼어붙고 터지면서 일감이 생겼다./날품팔이 노동자들은 눈보라 몰아치는/길거리에 깡통 불 지피며 목장갑을 쬐는데/(중략) 얼어붙고 동파돼야 사채 이자를 겨우 갚을 수 있다/용대리 덕장 황태처럼 얼어붙어야 자식 급식비를 댈 수 있다/늙어버린 아내는 일당을 받아 들고 해진 웃음을 겨우 짓는다." (2009년 12월30일)
절망그는 절망의 끝에도 섰다. 열두 평 영구임대아파트 고층 베란다 앞. 그가 불법 거주했던 곳이다.
"삶과 죽음은/한 발자국 차이/투신 베란다에서/위험한 희망을 보았다.//(중략)끝내, 살아/옆구리 찢어서/신장 나눠주고 산/그 사내를 나는 안다." (그 사내)
절망의 끝에서 날아오른 그 사내가 시인 조호진이다. 그는 얼굴도 모르는 25세 청년에게 자신의 신장을 대가 없이 내줬다. 다시 살기 위해서였다. 거기서 얻은 게 또 '희망 한 톨'.
그가 <오마이뉴스> 등 언론사 기자로 15년 동안 일하다가 사표를 낸 뒤 찾아간 곳은 가리봉이었다. 한 톨 희망을 주기 위한 길. 그곳엔 자화상 같은 이주노동자들이 많았다. 임금체불과 산업재해 그리고, 불법체류자로 온갖 피해와 수모를 당하는 그들을 5년 가량 도왔다. 자기를 찾는 일이었다.
그는 또 다른 어린 자기를 돕고 있다. 시인의 연년생 형은 버리고 떠난 엄마를 원망하고 분노하다 거리 소년이 됐고 끝내 소년원생이 됐다. 지금 그는 아픈 소년범과 함께 있다. 그 속에서 2부 '소년원의 봄'이 나왔다.
"10호 처분을 받은/너는 억울하다고 했다./아내를 병으로 떠나보낸/너의 아버지는 판사에게/선처를 호소했지만 돌아온 것은/무능한 아비의 등 굽은 눈물이었다./너를 소년원에 보내고 객지로 떠나/공사판 떠돌이로 저녁을 술로 때운/너의 아버지는 면회도 가지 못한 아비를/용서해라 미안하다 술에 취해 울다 잠들고/까까머리 소년수인 넌 신입방이 춥다고 했다./(중략)이불 덮어쓰고 덜덜 떨면서 홀아버지를 그리는 소년원의 겨울" (10호) *10호는 장기(2년 이내) 소년원 송치처분으로 소년범 중에 가장 무거운 처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