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무영 을유문화사 대표
주혜진
서울시 종로구 수송동, 조계사 옆 골목을 따라 들어가자 을유문화사라는 출판사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을유문화사의 '을유'는 바로 대한민국이 해방되던 해인 1945년에서 따온 이름이다. 70년이라는 세월 동안 이곳에서 만든 책 권수만 7000종이 넘는다. 해방 후 을유문화사에서 발간한 책들은 대한민국 지성사의 뼈와 살이었다.
특히나 초기에 나온 <우리말 큰사전>, <한국사>는 문화적 토양이 전무했던 시기에 사명의식이 없다면 만들지 못했을 책이었다. 그 후로도 <을유세계문학전집> 시리즈는 원문을 완역할 뿐만 아니라 국내 초역 작품을 발굴함으로써 숨어있던 명작을 국내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이외에도 '을유세계사상고전' 시리즈, '크로노스 총서' 시리즈, '현대예술의 거장' 시리즈를 비롯한 다양한 단행본들이 서가의 곳곳을 꿋꿋이 지켜왔다.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시간이 흘러도 식지 않는 인기를 자랑하는 대표적 스테디셀러다.
현재 을유문화사는 초창기 설립 멤버 정진숙의 아들 정무영 대표가 이끌어가고 있다. 출판사가 세워진 지 70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의 정 대표가 여전히 강조하는 바는 그의 선친이 강조하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안 팔리더라도 좋은 책을 만들자" 특별한 기회를 노리기보다는 한결같은 꿋꿋함이 을유문화사의 비장의 카드였다. 정무영 대표를 만나 을유문화사의 지난 70년을 이끌어온 역사와 출판 철학 그리고 앞으로의 70년의 비전에 대한 물음을 던져 보았다.
독자 눈높이 높이는 양서 출간이 목표 - 70년이란 오랜 세월을 지식 상품인 책으로 버텨온 을유문화사만의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특히나 해방 이후는 무척 척박한 환경이었는데요. "을유문화사가 1945년 시작할 때 목표 네 가지가 있었어요. 첫째로 원고를 엄선해서 민족문화 향상에 기여한다. 둘째는 교정을 엄밀히 해서 오실이 없도록 한다. 세 번째가 제품을 지성으로 만들어서 독자의 사랑을 받는다. 네 번째가 가격은 저렴하게 매겨서 독자들에게 봉사를 한다. 지금도 이 원칙을 항상 염두에 두고 경영에 임합니다.
창립 이래 70년을 맞이하기까지 변하지 않는 것은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독자의 눈높이를 높이는 양서를 출간하는 것이에요. 비록 판매가 부진하더라도 꼭 내야 하는 책이라면 출간하고, 또 양서를 알아보는 독자를 믿는 것이죠. 사람이 수명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충분한 운동을 하듯이, 을유문화사는 힘들지만 욕심부리지 않고 성실하게 좋은 책을 만들고자 정진합니다."
- 을유문화사가 책을 만들 때 반드시 고수하는 철학이 있나요? ""안 팔리더라도 좋은 책을 만들자" 1945년 을유문화사가 창립된 이래로 지금까지 견지해오고 있는 경영 철학이에요. 책은 일반 공산품과는 달리 반복적으로 구매하기가 어렵잖아요. 을유문화사는 단 한 권의 책을 출간하더라도 우리 사회와 문화에 어떠한 기여를 할 것인지 고려해왔어요. 그래서 단단한 사명감과 이를 지키기 위한 신념이 을유문화사의 책에 녹아 있죠. 나아가 이는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을유문화사의 정체성을 세우고 지나친 상업주의나 몰가치성을 배제하는 방향을 제시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 고 정진숙 전 대표로부터 물려받은 가장 큰 정신적 유산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버지가 항상 말씀하시던 게 출판은 이윤을 추구하는 사업이 아니라, 사회에 봉사하는 문화 사업이다. 그걸 항상 강조하셨거든요. 저도 그게 옳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릴 적부터 그 모습을 보아온 것이 무의식에 체내화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말 큰사전>이나 <한국사>같은 대작은 10년 가까이 걸렸고 좌초될 위기를 거쳐 완성되었습니다. 이는 사명감없이 이룰 수 없는 것이었어요. 저는 그저 선친의 뜻을 이어가고자 할 뿐입니다."
- 처음 을유문화사의 경영을 짊어졌을 때 부담감도 크셨을 것 같은데요. "출판계에 입문할 당시 두려움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부친께서 60여 년간 쌓아 오신 공적에 대한 두려움과 앞으로 을유문화사가 나아가야 할 미래가 제 어깨에 달려 있었으니까요. 무엇보다 변화하는 시장에 맞추고 선친의 뜻을 이어, 일시적인 이윤을 위해 무리하게 투자를 하거나 기획하지 않고 성실히 출판하는 을유문화사만의 호흡을 유지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누가 뭐래도 오직 한 길, 양서를 기획하고 출판하여 독자가 믿고 읽는 책을 만들어, 시장에 휘둘리지 않는 힘을 길러 난관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 을유문화사에도 한 번쯤은 위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어려운 순간은 없었나요? "최근에는 크게 위기라고 느낄 사건은 없었습니다. 그만큼 전통과 역사가 뒷받침하고 있고, 이제까지의 위기를 타산지석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에요. 을유문화사 역사상 큰 위기 중 하나는 6.25 전쟁 때였습니다. 사무실은 민청 중앙위원회에 접수당하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부산 피난 생활을 하였습니다.
9.28 서울 수복이 될 때 북한군이 철수하면서 사무실에 불을 질러 사무실에 쌓여 있던 책과 학교 교과서 공급 장부, 거래처 장부는 물론 금고 속에 있던 현금과 유가증권 등이 모두 타 버렸습니다. 당장에는 학교나 거래처인 서점 등에서 수금할 수 없었고, 그동안 출판했던 책과 관련 자료가 소실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창립 동인인 세 분이 각자 자기 분야로 떠나 부친 혼자서 모든 부채를 떠안고 을유문화사 재건 사업에 집중하였습니다.
그 후로는 '검인정 교과서 파동'으로 교과서 업계가 최악의 위기 상황에 몰려있을 때 새 교과서 검정실시가 있었는데 을유문화사도 이에 출원하기로 하여 작업을 하였습니다. 중.고등학교 1, 2, 3학년 교과서 6종씩 총 18종을 냈지만 모두 탈락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회사 사정이 급격히 나빠져 한규무 상무, 서수옥 상무, 안춘근 주간, 세 중역이 이에 책임지고 사퇴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 인문, 경제경영, 고전,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내는데요. 부서별 인적 구성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나요? "전 직원은 23명으로 편집부 인원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편집자 개개인의 역량이 마치 백과사전처럼 출중하여 어떤 분야의 책도 잘 소화하고 있습니다. 특히, <을유세계문학>은 자문위원단에서 우리 시대에 놓치지 말아야 할 세계문학을 선정해주고 계십니다. 무엇보다 세계문학이나 사상 등은 원전 번역을 기본 방침으로 세워두었기 때문에 관련 분야를 연구하는 연구진의 자문을 받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