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녀학교를 다니면서 누구는 해녀의 꿈을 더 단단하게 다졌노라고 했고, 누구는 생각보다 물질이 너무 힘들어서 낭만적인 꿈을 접기로 했다고 말했다.
강길순
# 해녀들의 공동체 - 할망바다, 불턱"만나면 만날수록 해녀는 불가사의한 존재였다. 해독 불능이었다. 기자 생활 25년 동안 나는 수없이 많은 직업군의 사람들을 만났다.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 공무원에서부터 사기꾼과 조폭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해녀들은 내가 접했던 직업군 중에 가장 난해했고, 한마디로 규정하기 힘든 존재였다." (프롤로그)8년 동안 제주올레길을 내면서 가장 많이 만났던 이들이 '해녀 삼촌들'(제주에서는 나이 많은 어르신을 '삼촌'이라고 부른다)이라지만, 서명숙에게 그들은 모순적 존재다. 독립적이고 주체적이면서도 가부장제와 남아 선호사상이 여전하고, 지나가는 올레꾼에게 밀감을 그냥 줄 정도로 인심이 좋지만, 해안가 소라 하나라도 가져가면 목청을 돋우는 게 해녀 삼촌들이다. 그러나 이는 해녀들의 겉모습일 뿐이다.
해녀들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실천하는 생태주의자다. 아무리 돈이 급해도 날마다 물질하지 않는다. 물에 드는 건 한 달에 12~15일 가량. 물때와 바람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안다. 그리고 '은행이자 창고'인 바당밭을 일구는데 정성을 쏟는다. 6~8월 산란기에는 소라의 채취를 스스로 금한다. 전복 종패를 키워 바당밭에 뿌려 풍요로운 미래에 투자하기도 한다. 바다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산소통에 의지해 남획하지 않고, 오로지 몸으로 자기 몫만을 채취한다.
해녀 공동체의 더불어 사는 모습도 인상 깊다. 빈 망사리를 메고 기가 죽어 바다를 나오는 초보 해녀에게 고참 해녀들이 자기가 잡은 문어, 전복, 소라를 넣어 망사리를 채워주는 '정'이 살아있다. 난다 긴다 하는 상군 해녀들도 나이를 먹으면 물질이 버거워진다. 그런 해녀 할망들을 위해 공동체가 만든 노후보장책이 '할망바다'다. 수심이 얕고 해산물이 풍성한 바당밭을 지정해 해녀 할망들만 작업하게끔 한 것이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가파도에는 아직도 '할망 바당'이 건재하단다.
육지 사람에겐 낯설지만, 제주 해녀들에게는 정겨운 단어가 '불턱'이다. 해녀 문화를 잘 보여주는 불턱은 말 그대로 '불을 쬐는 곳'이다. 해녀들은 이곳에서 해녀복을 갈아입고, 중간에 휴식도 취한다. 뿐만 아니다. 물질이 끝나면 도란도란 둘러앉아 몸을 녹이며 수다를 떠는 사랑방 역할도 한다. 작업 일정에 대한 논의부터 소소한 집안 이야기와 동네 소문들까지 오가는 불턱 사랑방에는 한 가지 불문율이 있다. '불턱에서 나눈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옮기지 않는다'는 것. 자유롭게 이야기하되, 갈등의 불씨는 없애는 해녀 공동체의 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