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숨, 나와 마주 서는 순간>
북하우스
그렇게 손길이 닿은 책들 가운데 두 권을 소개한다. 첫째로 알리고자 하는 책은 해녀를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이 읽기에 안성맞춤인 <숨, 나와 마주 서는 순간>(서명숙). 저자인 서명숙은 오랜 기자 생활 끝에 고향으로 돌아가 '제주올레길'을 개척해내 전국에 걷기 열풍을 일으킨 사회적 기업가. 그는 올레길을 내며 제주 곳곳에서 만난 해녀들의 이야기를 바탕 삼아 해녀의 삶과 역사를 책으로 알리기로 결심한다.
대통령, 국회의원, 공무원, 사기꾼, 조폭 등 몇십 년간 취재하며 인간군상을 만난 그이지만 해녀만큼은 "불가사의하며 해독 불능한 존재"라고 이 책으로 고한다. 자신이 접했던 직업군 가운데 가장 난해한 사람들이라며 해녀를 가리켜 "인류 최초의 전문직 여성"이라고 호명한다.
그도 그럴것이 해녀의 기원은 삼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 <고려본기>에 '야명주(진주)'를 나라에 진상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짐작컨대 삼국시대 이전부터 해녀의 물질이 시작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본래 깊은 바닷속 전복을 따는 건 해녀가 아니라 남자 '포작(바닷물 속에 들어가 조개·미역 따위 해산물을 채취하거나 국가의 각급 제사에 쓰는 어포(魚鮑)를 떠서 소금에 말려 진상하는 신역(身役)을 담당한 사람)'의 몫이었다(가까운 바다에서 해조류를 따는 건 여자 '잠녀'들의 몫이었다고 한다).
제주 깊은 바다에서 자라는 전복은 귀했지만 탐관오리들이 득세하는 조선시대에 진상해야 할 전복 할당량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 진상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포작들은 관아에 끌려가 곤장을 맞거나 이를 피해 도망가다 죽기 일쑤였다.
씨가 마른 포작들의 일을 대신 하기 시작한 건 잠녀들이었다. 바다 깊숙이 잠수해 곧잘 전복을 따오는 잠녀의 능력을 알아챈 조정 대신들은 잠녀에게 전복의 할당량을 징수하기 시작했다. 국가의 횡포가 해녀의 기원이 된 셈이다.
이후 해녀들의 자생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초등학교 입학보다 물질부터 배우는 애기 해녀의 탄생이 마을마다 익숙해져 갔다. 동시에 여자가 하는 위험한 일이라며 해녀의 업을 천대하는 문화도 만들어졌다. 자녀만큼은 해녀를 하지 않길 바라는 해녀 어머니의 바람과 달리, 소녀들은 묵묵히 해녀가 되어 바다와 삶을 동고동락해갔다.
일제의 수탈에 정면으로 맞선 해녀들
저자는 해녀들의 삶을 다각도로 조망한다. 수심은 얕지만 '여(바위)'가 발달해 해산물이 많은 구역은 나이 든 해녀이자 선배들이 안전하게 작업할 수 있도록 젊은 해녀들이 내어 준다는 전통 '할망바당'에 대해서도 소개한다. 양보의 선순환을 이뤄 노후책을 만든 해녀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해녀들이 십시일반 번 돈으로 초등학교를 세운 일, 호흡 장치를 달지 않고 물질을 하는 이유를 알려주는 대목도 눈길을 끈다. 그중 특히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저자가 항일운동가 해녀들의 활약상을 접한 순간이다.
"제주도에서 초중고를 다니면서도 나는 해녀들의 항일운동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아우내장터 3.1만세 사건을 주도한 유관순은 교과서나 위인전은 물론 고무줄놀이에서도 늘상 접했지만, 하도리 해녀항쟁을 주도한 김옥분의 존재는 까맣게 몰랐었다. 로마제국의 황제나 조선조 왕들에 대해서는 족보까지 달달 외우게 만들면서도 정작 나고 자란 지역의 향토사는 가르치지 않는 우리나라 교육 때문이다."
- <숨, 나와 마주 서는 순간> 중에서
하도리 해녀항쟁은 1931년 12월부터 1932년 1월까지 해녀조합의 횡포에 맞서 제주 해녀들이 벌인 시위로 1만7000여 명이 참여했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제주로 들어온 일본 자본가들은 해녀들이 채취한 감태와 전복의 가격을 강제로 헐값에 사들이려 했고, 분노한 해녀들이 이에 반발하여 해녀조합에 정상 매입을 요구했으나 조합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이에 해녀들은 1931년 12월 말부터 세화 장날에 나가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