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 기반, 콜센터 노동자가 된 현장실습생의 비극을 다룬 영화 <다음 소희> 중 한 장면.
트윈플러스파트너스㈜
떼쓰는 고객들이 즐비한 지옥 같은 일터에서 고객의 '상식적이고 자연스러운' 요청을 해결하고 감사하다는 목소리를 들었을 땐 놀랍게도 "보람찼다." 감정노동의 극한 장소라 불리는 콜센터에도 성취감이 있었다.
"삶의 허무함을 몰아내는 감각이 분명 우리가 하는 일에 녹아 있었다. 다만 그 감각을 경험하기 위해선 거대한 원석에서 참깨만 한 다이아몬드를 추출할 때처럼 어마어마한 양의 감정을 낭비해야 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밖에서 이 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견해와는 다르게 우리가 유한하게 보유한 에너지의 일부였다."
- <어떤 동사의 멸종>(한승태) 중에서
어쩌면 우리 모두 참깨만 한 노동의 성취를 뇌 해마 어딘가에 엔진처럼 저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콜센터 상담사로 분투하며 얻은 '참깨만 한 노동'의 행복감을 작가는 빠트리지 않고 술회한다.
그 와중에 극한 노동을 버텨내는 동료와 버티지 못하고 떠나는 동료, 직장에서 절대 만나지 말아야 할 관리자와 챙겨주는 관리자 등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그의 이야기에 등장한다. 그가 겪은 노동은 누군가가 또 그러한 오늘을 겪어내듯 온갖 삶의 맛을 끓여낸 진한 도가니탕이다.
관찰자가 아니라 실제 동료가 되어보는 연습
한승태가 구사하는 이야기엔 큰따옴표가 많다. 대화형 문장이 많다는 얘기다. 르포 에세이를 읽다 보면 지나치게 연구자적인 입장을 견지하느라 현장에 처한 당사자들의 개성이 소거됐다고 느낄 때가 있다. 즉, 관찰자의 견고한 '전지적 시점'이 취재의 목적을 잃고 이야기를 잡아먹을 때다.
그런 이야기엔 특정 분야의 산업재해 발생률과 처우 개선을 위한 당면 과제만 머리에 모호하게 남는다. 결국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의 표정이 이야기라는 수면 아래 가라앉고 만다. 한승태의 글에는 일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천태만상으로 일렁인다.
그의 글은 독자에게 관찰자의 입장이 아닌, 일하는 사람의 동료가 되어보는 연습의 눈을 길러 준다. 만화 <원피스>의 루피가 "너, 나의 동료가 되어라!" 하고 모험의 세계에 같이 입성할 것을 제안했듯이.
르포르타주를 공부한다면 <어떤 동사의 멸종> 마지막 챕터 "마무리하며: 쓰다"를 일독하길 권한다. 논픽션이 "공동체의 투병기"인 까닭, 작가가 자신의 결점을 글에 드러내야 하는 이유를 만날 수 있다. 르포 작가가 지녀야 할 윤리들이 꿀팁처럼 담겼다.
양계장과 사육장, 자동차 부품공장 등 동물의 살점과 똥, 이주민과 내국인의 갈등이 난무하는 노동 현장에서 한승태는 일관되게 들여다봤다. 같이 일하는 사람의 말습과 살아온 내력, 온갖 모순에 번민하는 자신의 마음을. 그는 '동료들'의 처지를 연민으로 보지 않으며 싸구려 위로를 내뱉지도 않는다. 그의 책에 나오는 큰따옴표는 그래서 힘이 세다. 그것은 '신성한 노동'이 아닌 노동 안에 '신성한 숨'을 뱉고 삼키는 사람이 있음을 알게 하는 울타리다.
한승태 작가는 "한국어에서 가장 공격적인 단어가 '상관없어'라는 말"이라며 이렇게 염원한다. 사람과 돼지가, 고시생과 선원이, 사장과 직원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서로 상관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2049년 AI가 소설가를 대체할 거라는 전망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AI는 글을 써야할 이유도 바람도 없는 무생물이다.
책 말미, 그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관있게 만드는 글을 쓰고 싶다"고 밝힌다. 그것이 성공했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고 담담히 고백하는데, 왠지 증거를 내밀지 않는 게 독자의 도리인 것만 같다. 그럼에도 출근이 이어지는 내 여름을 청명하게 해준 작가의 쓰기 근육이 기운차게 탄탄하길 바라는 염원이 나 역시 든다. 그리하여 달아보는 다짐 같은 독후 한줄평.
"이 책을 읽고 멸종해가는 나와 동료들에게 한 뼘 더 고요히 상관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습니다. 적어도 몹시 피곤한 어느 하루에라도."
어떤 동사의 멸종 - 사라지는 직업들의 비망록
한승태 (지은이), 시대의창(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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