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 시판되고 있는 다이얼식 경구 피임약 오르소 트리사이클린(Ortho Tri-Cyc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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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개발한 오르소 트리사이클린은 사용법을 따르지 않을 경우에 효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거나 일부 부작용 사례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과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안전성에서도 대중적인 인정을 받았다. 존슨앤존슨측 오르소 맥네일(Ortho-Mcneil Survey) 보고서에 따르면, 경구 피임약 사용자들의 98%가 만족스럽다고 답했을 정도였다.
오르소 트리 사이클린이 여성들 사이에 일상품이 되면서 예상치 않은 부수효과도 나타나 우리를 고무시켰다. 오르소 트리 사이클린을 상용한 여성들이 얼굴의 여드름이 최료되는 효과를 보고 있다는 보고가 속속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주 심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왠만한 증상의 여드름 등 피부염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자, 미국 식약청은 오르소 트리 사이클린을 여드름 치료제로도 공식 인정했다. 피임약 연구 과정에서 내가 쏟아낸 논문들은 1980년대 말 연구과제 가운데 하나였던 어린이 성조발증 치료제인 히스트렐린(Histrelin)을 개발하는데에도 큰 역할을 했었다.
오르소 트리사이클린이 경구 피임약 시장을 석권한 이후 나의 생활은 엄청나게 바빠졌다. 그동안 소수의 관련 전문가들에 의해서만 인용되던 200여편의 내 논문들이 미국은 물론 세계 각국의 산부인과 전문의들과 피임약 연구가들에 의해 샅샅이 뒤적여 지기 시작하면서 내분비선학회, 산부인과학회, 제약연구가 세미나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여행을 해야 했다. 미국국립보건원(NIH)은 내 단골 방문처가 되었다. 사실, 나는 노개스티메이트 발견 전인 1980년대 중반부터 미국내는 말할 것도 없고 빈번하게 해외 여행을 했었다. 내가 다른 동료들에 비해 해외 여행이 잦았던 이유가 있었다.
회사측과 동료들은 나의 연구가 아카데믹하게 진행되기를 원했으나 내 생각은 달랐다. 연구라는 것이 현장을 무시하고 책상이나 좁은 공간에서만 이루어지면 실용성이 떨어질 뿐 아니라, 아이디어를 창출해 내는 데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또한 탈북 이후로 나의 삶의 신조가 '무엇을 하든 타인에게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유익을 주는 일을 한다'는 생각이 주를 이룬 탓도 있었다. 이런 연유로 나는 1980년대 중반부터 아카데믹 리서치를 인더스트리얼 리서치(Industrial Research)쪽으로 연결시킨 여러편의 논문들을 발표했다.
나의 피임 연구가 제약업계를 넘어서 외부 산업계에 많이 알려지자 이곳 저곳 국제 기관이나 정부 기관에서 초청하는 일이 많아졌고,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덧 산업분야 리서치의 권위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러던 터에 내가 맥과이어와 함께 발견.개발한 오르소 트리사이클린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으니 하루가 멀다 하고 초청장이 날아들었다.
독일, 영국, 프랑스, 영국, 이태리 등 유럽국들은 물론, 크고 작은 남미 국가들, 일본, 대만, 싱가포르, 중국, 러시아에까지 불려 다녔다. 종종 초청장을 보냈던 국제 기구들까지 가세했는데, 국제개발기구(AID), 세계보건기구(WHO) 등에서도 여러차례 초청하여 피임 관련 자문을 구했다. 식량 문제와 인구 조절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고조되었던 때였는데, 이상하리만치 한국에서는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와중에도 나는 존 맥과이어와 함께 울만스 산업화학 백과대사전(Ullman's Encyclopedia of IndustrialChemistry)의 피임 섹션을 공동으로 집필하여 후배 피임 연구가들이 두고 두고 참고할 수 있도록 했다. 나중에는 마퀴스 인명사전(Marquis Who's Who)에 오르는 영예를 맛보았다. 1990대초 나는 피임약 분야에서 '국제 인사'가 되어 있었고, 이로인해 오랫동안 가슴깊히 묻어 두었던 '소원'을 풀게 되었다.
"양강도 후창군 사람, 한도원을 찾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