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 10월 중국가족계획위원회 초청으로 북경을 방문했을 당시 찍은 사진.
한도원
북한의 부모님이 나를 애타게 찾고 계신다는 소식을 캐나다 거주 동포로부터 듣고 온 다음날부터 나는 며칠을 앓았다. 꾹꾹 눌러두었던 그리움이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오면서 시도 때도 없이 부모님과 동생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연구실 창밖으로 낙옆이흩날리는 광경을 보노라니 고향집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문득 어릴적 종일 산야를 싸돌아다니며 정신없이 놀다가도 어두어둑 날씨가 추워지면 냅다 집으로 달려가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서 더 추워지기 전에 북한을 방문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찾는 광고가 1년 전쯤 실린 것이니 그 동안에 북측의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기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마침 중국과 싱가포르에서 산아제한 관련국제 세미나에 초청을 받게 된 것이다. 특히 중국 국립가족협회가 주최하는 세미나를 끝내고 나면 약 열흘간 짬이 생기게 되는데, 그 기간에 혹 북한을 방문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주변의 친구들에게 나의 계획을 말하니 모두가 깜짝 놀라며 만류하는 분위기였다. 북한은 지구상에 몇 남지 않은 미국의 적성국으로, 방문했다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각오가 생각보다 굳다는 것을 안 아내와 미국 친구들이'그렇다면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가라'고 권유했다.
우선 회사 측에 나의 계획을 밝히자 몇몇 미국인 친구들이 직접 나서서 친분이 있는 국무부 한국과 관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나의 간절한 소망을 알게 된 국무부에서는 '북한방문과 관련한 모든 편의를 제공하겠지만, 혹시라도 북한에서 억류될 경우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원칙론적인 답변을 보내왔다. 1990년 당시에도 미국과 북한의 관계는 종전과 다름없이 난기류가 흐르고 있었고, 미국 국적 과학자인 내가 되돌아오지 못할 경우, 자칫 골치 아픈 국제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우리는 썩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지만 당신이 그렇게도 북한 방문을 원하니 알아서 하라'는 입장이었다.
북경으로 떠나기에 앞서 나는 아내에게 "그럴리야 없겠지만, 만약에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아이들은 다 컸으니 제 앞가림을 할 것이고, 내 앞으로는 나오는 연금이 있을 테니 생활을 꾸리면 될 것"이라며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아내는 "설마 국제적으로 알려진 당신에게 무슨 일이야 있겠느냐"며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북한에 다녀온 후에 아내 말을 들으니 당시에 속으로는 '아, 이 양반이 우리를 버리고 떠나는구나'하는 야속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부모형제 없이 천상천하에 외톨이로 세상을 살아온 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아내는 그때에도 담담히 나의 결정을 받아주었다.
초청장도 없이 "북한 보내달라"?1990년 10월 어느날,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북경으로 향했다. 이전에 세 차례나 중국을 방문했지만, 이번 방문은 세미나보다는 북한 방문이 목적이었던 만큼 발걸음이 편치가 않았다.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오랜 친구이자 쾌남인 북경대 교수가 나의 얘기를 듣더니 "도울 수 있는 껏 돕겠으니 반드시 소원을 풀라"고 격려해 주었다. 북경에 북한 대사관이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나는 그 친구의 도움으로 대사관 주소를 알아냈고, 도착한 다음날 아침 택시를 잡아 타고 북한 대사관으로 갔다.
북한 대사관 앞에 도착하니 북한 군인으로 보이는 경비병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건물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무슨 학교 건물이었던 듯 얼핏 보기에 규모가 커 보이는 건물이 널따란 운동장 저 편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는 택시 운전사에게 "대사관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한 시간 후에 나오지 않으면 곧바로 북경대학의 내 친구를 찾아가서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다고 전하라"고 당부했다. 그리고는 그에게 대사관까지 나를 싣고 온 비용은 물론 북경대학까지 가는 택시 비용까지 합한 금액의 반절을 주며 "나중에 대사관에서 내가 무사히 나오면 나머지 반절을 주겠다"고 했다. 눈치를 챈 그는 흔쾌히 "알았다"며 나를 내려 주었다.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낮게 헛기침을 한 나는 정문 앞에 보초를 서고 있는 북한 경비병에 다가섰다. 저만치에서 차를 내릴 때부터 나를 지켜보던 그가 잔뜩 경계하는 눈초리로 내게 물었다.
"웬일로 왔습니까?""내 고향은 북한 양강도 후창입니다. 가족들이나를 찾는다기에 북한을 방문하러 왔습니다.""초청장이 있습니까?""아뇨,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왔습니다.""아니, 아무것도 없이 무작정 여기에 오면어쩌자는 겁니까?""여기 부모님들이 나를 찾는다는 증명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초청장을 받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좀 알려주시오."그는 내가 내민 신문 광고지를 잠시 살펴보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초소 안으로 들어간 경비병이 어딘가로 전화를 하는 듯했다. 10여 분쯤 지나 그가 다시 나오더니 문을 열고손짓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겨 정문 안으로 들어섰다. 북한 영토에 들어섰다고 생각하니 잠시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휑댕그레 텅빈 운동장을 한참 걸어들어가니 제법 규모가 큰 건물이 버티고 있었다.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사무원으로 보이는 여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녀 역시 내게 "초청장이 있느냐"고 묻기에 들고간 광고지를 내밀며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대번에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상관인 듯한 사람에게 전화를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장 차림의 남성이 긴 복도를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접수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나는 그가 내 사정을 알고 왔으리라는 짐작으로 닥아가서는 신문 광고지를 내밀었다. 신문에 난 광고를 살펴보던 그가 난처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대략 무슨 사정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런데, 당신처럼 개인적으로 조국을 방문하겠다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단체로 우리 정부의 초청을 받아 가는 경우라면 모를까 이런경우는 쉽지 않을 듯합니다.""나는 세계 굴지의 미국 제약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신원이 확실한 사람입니다. 고향을 방문하여 부모님을 꼭 만나고 싶습니다."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간청을 듣던 그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일단 당신과 같은 방문 사례가 없어서 내가 어찌해 볼 사안은 아닙니다. 일단 평양으로 연락을 해 보겠습니다. 오늘 돌아가서 기다리시면 가부간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한밤중 걸려온 전화 "내일 정오 평양으로 떠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