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도 여객선에서 본 가파도
황보름
마라도로 가는 표를 사러 매표소에 들렀다. 역시나 마라도로 가는 매포소 앞엔 줄이 길다. 가파도 여객선과는 달리 마라도 여객선에선 맥주도 팔고 쥐포도 팔았다. 1층 끝에 자리 잡은 매점을 지나치는데 매혹적인 쥐포 냄새가 코끝을 때려온다. 꾹 참고 2층 갑판으로 올라와 테이블 맨 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다를 보며 갈 생각이었다.
바다를 보는 건지,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두 남자의 '사진 찍기 삼매경'을 보는 건지 애매한 상황이 5분쯤 지속됐다. 학교 선후배인 듯 보이는 두 남자가 배가 출발하기 전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하더니 배가 출발한 후에도 쉬지 않고 계속 찍어대 내가 생각하기엔 수백 장의 사진을 배 안에서만 건지고 있었다. 그중 반 이상은 후배가 찍어주는 선배 사진이었고, 선배는 후배를 찍어주지 않아 후배는 주로 셀카를 찍었다. 그들 사이사이로 바다가 보였다.
두 남자에 정신이 팔려 있다 보니 나는 내가 의자에 엉덩이만 겨우 걸치고 앉아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이 테이블엔 내가 가장 먼저 자리를 잡았으나 그 뒤 등산복을 입은 내 부모님 뻘 되는 어른들이 한 명 두 명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테이블이 꽉 찼고 나는 점점 밀려나 겨우 엉덩이만 걸치게 된 거였다.
테이블이 꽉 차자 그중 남자 어른들은 멀미를 하지 않으려면 맥주를 마셔야 한다면서 오전 11시에 쥐포와 맥주로 한 판을 벌였다. 부부 동반인 것 같았다. 여자 어른들도 이 아침부터 무슨 맥주냐고 남자들을 힐난하더니 함께 마신다.
배의 속도가 온몸에 전해져 왔다. 배가 만들어내는 우유빛깔 물살에 절로 환호성이 나왔다. 나는 물론 속으로만 환호성을 질렀다. 그때 한 아주머니가 나 대신 진짜 환호성을 쳤다.
"와아아아. 정말 좋다. 이런 게 사는 건데!!!"아주머니의 환호성에 주위 분들이 돌아가며 한 마디씩 맞장구를 쳐준다.
"그치.""그렇지.""그렇지.""이런 게 사는 거지."나도 속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렇네요, 이런 게 사는 건데요.'
옆에 앉은 아저씨가 이젠 거의 내 팔짱을 낄 것처럼 가까워져 왔을 때 마침 나는 일어서려고 했었다. 배 옆 난간으로 걸어가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끼어 들었다. 저 멀리 가파도가 가까워져 오는 게 보인다. 옆에서 셀카를 찍던 여자가 가파도를 배경으로도 셀카를 찍는다. 이 여자는 저게 가파도인 걸 알까. 나는 나도 모르게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저 섬이 가파도예요.""네?""지금 찍고 계신 저 섬, 가파도라구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키가 작은 섬."여자는 이제야 알게 됐다는 의미의 몸짓을 내보이고는 셀카는 그만두고 가파도를 사진에 담는다. 나는 이제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막 말을 붙이는 사람이 된 건가.
마라도를 수호하는 애기업개 당마라도로 가는 배 안에서 나는 미리 읽어두었던 마라도 전설을 떠올렸다. 먼 옛날, 마라도 섬 주변엔 각종 어류, 해산물이 풍부했단다. 하지만 사람들은 바다신이 노할까봐 함부로 그것들을 잡을 수 없었고, 오직 매해 봄, 보름 동안만 마라도로 건너가 물질을 할 수 있었다. 그 해에도 사람들은 마라도로 향했고 전복, 소라 등을 듬뿍 잡았다. 그런데 떠날 날이 되어 배를 띄우자 갑자기 바람이 불고 바다가 거칠어지는 것이 아닌가. 더 이상한 점은, 배를 묶으면 바다는 다시 잔잔해지고, 배를 띄우면 다시 거칠어지는 거였다.
바다의 이유 없는 변덕 때문에 사람들은 마라도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몇 명의 사람이 같은 밤 같은 꿈을 꾼다. 여자 아이를 두고 가면 배를 띄울 수 있을 것이라고 꿈은 전했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여자 아이를 두고 마라도를 떠났다. 사람들이 무사히 건너간 바다를 향해 여자 아이는 울부짖는다. '나도 데려가 줍써!'.
3년 만에 다시 찾은 마라도에서 사람들은 여자 아이의 뼈를 찾았다. 그리고 그 뼈를 묻은 자리에 애기업개 당을 세운다. 처녀당 혹은 할망당이라고 불리는 이 애기업개 당은 이후 마라도 사람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수호신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나 같으면 나만 두고 간 사람들에게 열이 받아서 수호 같은 건 안 해줄 것 같은데, 그 여자 아이는 착한 아이였던가 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걸 받아들였던 거겠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섬, 마라도로 향하는 배 위에서 나는 3년을 홀로 지냈을 여자 아이를 떠올렸다. 그 아이의 마지막 숨결이 아직도 마라도에 남아있을까.
30분쯤 걸렸나. 마라도 선착장에 도착했다. 기암절벽을 가로지르는 계단을 올라 드디어 마라도 땅에 발을 디뎠다. 마라도에 도착하면 무엇을 가장 먼저 볼 수 있을까? 현무암 바위들? 아니면 돌담? 너른 초원? 그것도 아니라면 마라도 등대? 이 모든 것이 아닌 내 눈에 가장 먼저 띈 건 족히 열 곳은 돼 보이는 짜장면집. 왜 사람들이 마라도 하면 짜장면을 떠올리게 됐는지 알 수 있었다. 짜장면집이 이렇게나 많을 줄은 몰랐다.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짜장면집을 보니 절로 입 속에 침이 고인다. 우선 섬을 한 바퀴 돈 뒤에 먹을 생각이었지만, 미리 어느 곳에서 먹을지 정해놓고 싶었다. 저마다 내가 최고라고 외치고 있으니, 어느 곳이 최고일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맛집을 찾는 가장 탁월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이곳 주민에게 물어보는 것.
물티슈를 살 겸 들른 편의점에서 계산을 하며 물었다.
"짜장면 어디가 제일 맛있어요?"아저씨는 잘못 들으셨는지 이렇게 대답을 해준다.
"짜장면집이 9개가 있어요.""아, 그중 어디가 제일 맛있어요?""바로 옆에 있는 짜장면집으로 가요. 내가 하는 덴데 정말 맛있어요.""네? 아, 네."편의점도 하고 짜장면집도 하는 능력자 아저씨의 추천은 귓등으로 흘리며 밖으로 나왔다. 우선은 마라도를 한 바퀴 돌아보는 게 좋겠다.
바람의 왕국 마라도, 이 바람을 어떻게 견딜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