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시미 아쉬람의 부럼 선생이 보낸 청년, 그는 민간요업을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송성영
그가 몸조리 잘 하라며 일어섰다. 왕진비를 챙겨 주려고 지갑을 꺼내자 그는 극구 사양했다. 돈을 받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갑을 꺼낸 내 손이 부끄러웠다. 그는 락시미 아쉬람 학교의 간호 선생이 아닌가 싶었다. 그는 자신이 배우고 있는 민간요법으로 락시미 아쉬람 학교의 아이들과 가난한 농민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듯했다. 그가 떠나고 나서야 그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늦은 오후가 되자 학교 수업을 마친 부럼선생이 찾아왔다. 민박집 비노트씨와 친구 사이기도 한 그는 퉁퉁 부어오른 내 무릎을 살펴보더니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 보는 게 좋겠다고 말한다. 나는 가텀씨에게 말했던 것처럼 하루 이틀 더 지켜보고 결정하겠다고 말해 놓고 송별회 얘기를 꺼냈다.
"무릎 상태가 좋아지면 약속한 대로 송별회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부럼 선생네 집에서 송별회를 고집한 이유내가 가텀씨가 추천한 요기 식당을 등지고 부럼 선생네 집에서의 송별회를 고집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요기 식당에 지불할 돈을 음식 솜씨가 좋은 부럼 선생의 아내에게 주고 싶었던 것이다. 부럼 선생이 몸담고 있는 락시미 아쉬람 학교는 후원금으로 운영하고 있다. 한국의 열악한 대안학교의 선생들처럼 일반 학교 선생들 월급의 반도 채 안 되는 박봉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 부럼 선생에게 작은 성의를 보이고 싶었다. 낯선 이방인인 나에게 '내 집처럼 편하게 오고 가라며' 한 가족처럼 대해준 부럼 선생네 가족에게 뭔가를 통해 보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가난한 여행자인 나로서는 딱히 도울 방법이 없었다. 적선하듯 몇 푼의 돈을 내민다는 것은 큰 실례인 것 같아 고심 끝에 생각해낸 것이 부럼 선생 아내에게 송별회 음식을 부탁하고 적은 액수의 돈을 주는 것이었다.
밤이 되자 통증이 밀려왔다. 진통제도 소용없었다. 통증은 흐릿한 정신을 예민하게 일으켜 세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불면증으로 시달리는 밤처럼 아내에 대한 분노심이 솟구쳐 올라왔다. 몸과 마음이 지쳐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가 악몽에서 깨어났다.
이전과 거의 같은 악몽이었다. 아내가 나를 죽일 듯이 몰아 세웠다. 나는 그녀에게 바락바락 소리를 내질렀다. 제발 좀 나를 그만 괴롭히라며 분노했다. 분노에 휩싸인 채로 울부짖었다. 그리고는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둔 공간 속에 갇혔다. 숨이 막혔다. 그 숨 막히는 공간에서 빠져 나오려 안간힘을 쓰다가 어느 순간 꿈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그 악몽에서 깨어나고 싶어 발버둥 치다가 숨을 몰아쉬며 겨우 깨어났던 것이다.
방안이 꿈속의 어두운 공간처럼 느껴졌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침대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켜 조심조심 무릎을 접어 보았다. 퉁퉁 부어있는 무릎이 통증과 함께 쉽게 접혀지지 않았다. 겨우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렸다. 지팡이에 의지해 힘겹게 숙소 베란다로 나섰다.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밤하늘에 북두칠성이 또렷하게 보였다. 한국의 집 앞에서 보는 그대로다. 한국에서 머나먼 북인도까지 와서 나는 여전히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 혼란스럽게 입력되어 있는 기억들을 지워 버리고 싶었지만 밤하늘에 선명하게 떠 있는 북두칠성처럼 도무지 지울 수가 없었다. 악몽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할수록 버럭버럭 화를 내며 나를 몰아세우고 있는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이 머릿속으로 또렷하게 박혀 왔다.
하지만 그녀가 내게 화를 내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런 그녀를 미워하는 내 안의 분노심이었다. 그 분노심은 무릎 통증보다 더 가혹하게 나를 압박해 왔다. 3년 전 집을 나와 산중을 떠돌아다니며 어느 정도 벗어났다고 생각했던 분노심은 내 안에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그 분노심이 불꽃처럼 솟구쳐 오르기 시작하면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병원을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무릎 통증이나 위장이 뒤틀리는 통증은 분노심에 휩싸여 있는 것에 비하면 잠시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했다. 육신의 통증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것이지만 내 안의 분노심은 3년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내 안에 숨겨져 있는 분노는 꺼지지 않는 불씨였다. 그 불씨에 불이 붙으면 내 마음을 집어 삼킨다. 그 어떤 물로도 꺼지지 않는다. 온 바닷물을 다 들이부어도 꺼지지 않는다.
내 안에 깊이 박혀 있는 그녀에 대한 분노심만 없애 버릴 수 있다면 다리 한 짝을 희생시켜도 상관없다는 절박한 생각까지 들었다. 내 스스로를 갉아 먹고 있는 분노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나의 어리석음 때문이었다. 그 어리석음을 빤히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또한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불현듯 중국선종의 2대조 혜가(慧可) 스님이 떠올랐다. 혜가 스님은 소림사에 머물러 면벽 좌선 하고 있는 달마대사의 제자가 되어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법을 구하기 위해 팔 한 짝을 잘라 받쳤다. 달마대사의 제자가 되기 전에 신광으로 불렸던 혜가 스님은 수행승이었다.
고통의 원인이 되는 세 가지 독소인 욕심, 분노, 어리석음의 탐진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수행자들은 보다 깊은 고통 속에 빠져들기 마련이다. 물이 맑아질수록 티끌이 선명하게 드러나듯이 오감이 예민해질수록 내면에 숨겨진 고통의 원인이 되는 탐진치 또한 선명하게 드러난다. 수행승 혜가 스님에게 시시때때로 인지되는 탐진치는 고통, 그 자체였을 것이다. 달마대사는 부처님의 법을 통해 그 고통의 원인인 탐진치에서 벗어나는 길을 열어줄 수 있는 큰 스승이었기에 팔 한 짝을 베어내는 육신의 고통을 감수했을 것이었다.
혜가 스님이 달마대사에게 팔 한 짝을 잘라 받치기 전이었다. 달마대사는 석실 문 앞에서 새벽까지 눈을 맞고 서 있는 그에게 말했다.
"부처의 높은 도는 무한한 생을 두고 신명(身命)을 버리며 정진 수행해서 참기 어려운 일을 능히 견디고 하기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하여서야 비로소 성취하는 것인데 너 같은 적은 덕과 적은 지혜를 가지고 게다가 가볍고 용렬하여 거만하기까지 한 그런 마음으로 어찌 진실한 불법을 감히 구하려 하느냐?"혜가 스님을 향한 달마대사의 일침은 내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적은 덕과 적은 지혜를 가진 가볍고 용렬하고 거만한 자'가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나는 아내에 대한 분노심조차 다스리지 못하면서 세상에 좋은 마음을 내놓아 가며 살고 지고자 했다. 적은 덕과 지혜로 가볍고 용렬하고 거만한 마음으로 얼치기 진보주의자가 되어 주변 사람들에게 툭하면 정의롭고 소박한 삶이 어떻고 행복한 삶은 어떠니 입버릇처럼 주절거리며 살아왔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가텀씨가 다시 찾아왔다. 그는 내 무릎 상태가 호전되지 않는 걸 확인하고는 알모라 보다는 델리로 갈 것을 권했다.
"송! 델리로 가요. 알모라에 갈 바에 델리에 있는 큰 병원에 가는 게 좋겠소. 나에게 명상을 배운 독일인 제자가 델리 병원에 있습니다. 그 제자에게 전화로 부탁해 놓겠습니다." 독일인 여자를 만나 독일에서 명상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가텀씨의 고향은 델리다. 델리에 자신의 형제들을 비롯해 지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만약 정밀 검사 끝에 무릎 상태가 좋지 않아 수술을 하게 될 경우 델리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독일인 제자가 도움을 줄 것이라 한다. 하지만 나는 이미 어젯밤 병원에 가지 않기로 결심을 굳혔다.
가텀씨 제자 덕분에 제대로 정밀검사를 받아 큰 돈 들이지 않고 수술을 한다 해도 더 이상 인도 여정은 어려울 것이었다. 결국은 병원 신세를 지다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곧장 한국으로 날아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저 뿌리 깊은 아내에 대한 분노심을 내려놓지 않고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는 무릎 통증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병인 내 안의 분노심을 치유하는 데 온 몸을 던져 보기로 작정했다. 앞으로 남은 인도 일정 중에 분노심만 치유될 수 있다면 평생 무릎 때문에 고생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병든 마음자리에 몸이 성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너무나 고맙습니다. 가텀씨. 당신의 마음은 진실로 고마운데 병원을 포기할 작정입니다. 그냥 내 몸을 하늘에 맡겨볼 작정입니다.""그래도 좋겠지요. 당신 마음속에 자리한 부처님이 그런 당신을 보호해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