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난 노인의 힘든 표정이 불면증에 시달리는 나를 닮았다.
송성영
"헤이 송, 당신은 아무나 만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다면서요.""물론입니다. 내가 아무에게나 인사한 덕분에 여기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됐습니다." 카텀씨는 인도 카스트의 귀족 계급인 크샤트리아 집안이라고 한다. 그는 나처럼 음식값이 저렴한 노동자들이 즐겨 이용하는 식당을 찾는 소탈한 사람이었지만, 크샤트리아 계급이 몸에 배어 있어 그런지 길거리나 상가에서 아는 사람들을 만나면 먼저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냥 가볍게 손을 들어 '헤이 잘 지냅니까?' 정도로 인사를 한다. 그런 그로서는 내가 남녀노소, 노동자, 농민 할 것 없이 길거리에서 만나는 그 누구에게든 공손하게 합장을 하며 인사를 하고 다닌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질 않는 모양이었다.
"코사니 사람들 중에 당신을 아는 사람들이 제법 있더군요. 당신이 보는 사람들 마다 인사를 하고 다닌다고... 코사니에 온 지 얼마나 됐죠?" "한 달이 다 되어 가고 있습니다."한국에서 온 중년 사내가 날마다 사진기 하나 챙겨 들고 할 일 없이 길을 걸으며 만나는 사람, 아무한테나 인사를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났던 모양이다. 가텀씨가 약간 비아냥거리는 듯한 말투로 킬킬거리며 그 말을 할 때 그가 명상가이기보다는 카스트 계급의 크샤트리아 귀족처럼 보였다. 나는 그런 그에게 분심을 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난 매일 아침 마다 산책을 나서면서 어른, 애, 여자, 남자, 별 볼일 없는 노동자에게 이르기까지 합장을 하며 나마스테 인사를 합니다. 하물며 개에게도 아침 인사를 합니다. 당신은 불교신자라고 했지요. 부처님께서 모두가 부처다 라고 말씀하질 않았나요?"그가 내 영어를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에게 건방을 떨어가며 했던 말에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그렇다고 내가 부처의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낯선 인도 사람들에게 인사를 나누는 것은 온전히 상대를 공경한다기보다는 당장 내가 편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그냥 멀뚱멀뚱 지나치는 것보다 서로 인사를 하고 웃음을 나누는 것이 마음 편하고 좋았기 때문이다.
문득 한국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허리 굽혀 합장을 하며 인사를 하고 다닌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싶었다.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덕망 높은 스님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스님을 만나려면 불상 앞에서 삼천 배를 올려야 했다. 만약 그 스님이 법당에서 삼천 배를 하는 대신에 "애, 어른, 남자, 여자, 사람, 짐승 가리지 않고 길을 가다가 만나는 삼천 명의 생명에게 절을 하고 나서 나를 만나러 오라"라고 했더라면 어떠했을까라는 생각이 스친다.
상냥한 농촌 사람들과 달리 값비싼 호텔 이용객들은...인도 사람, 특히 이곳 코사니 농촌에서 인사를 반갑게 받지 않는 사람은 열에 한두 명 정도다. 그들은 대부분 값비싼 호텔을 이용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건성으로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할 때 마다 조금은 기분이 상한다. 따지고 보면 나는 차별없는 불심으로 인사를 하고 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서 웃음의 응답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었다.
뭔가를 바라는 만큼 괴로움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뭔가를 바라는 마음을 털어내야 한다. 생각은 그리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런 상황이 닥치면 감정에 사로잡힌다. 작은 움직임에 일렁이는 호수처럼 내 마음은 금세 파동을 일으켜 반응한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은커녕 나 스스로 장막을 치고 있었다. 부처의 마음을 엿보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나는 나 자신의 안위에 갇혀 있었다.
나는 철저하게 이중적인 인간이었다. 겉으로는 공손하게 웃고 있었지만, 밤이 되면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에 대한 분노에 휩싸여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밤마다 찾아오는 불면증이 점점 심해지면서 몸이 쳐지고 눈조차 침침해지기 시작했다. 새벽 산책을 다녀오면 그나마 본래대로 눈이 회복되는가 싶다가도 밤이 되면 다시 눈이 침침해진다. 노트북 앞에서 돋보기안경에 의지하지 않으면 글씨를 읽어 내기 힘들 정도다. 거기다가 하루에 한두 끼, 그것도 채식위주의 식단이었기에 시력과 함께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요즘 불면증 때문에 몸이 약해졌어요. 고기를 먹어야겠는데...""고기가 먹고 싶다고요? 당신 채식주의자 아니었나요?""아닙니다. 체력이 떨어지면 가끔 고기를 먹습니다. 코사니에 닭요리 하는 식당이 없죠?""그런 식당은 없지만, 닭을 잡아 주는 곳이 있어요.""요리 해 먹을 수가 없잖아요." "철물점 부럼씨에게 부탁해 볼게요. 부럼씨 가게에 주방이 있으니까, 거기서 직접 요리하면 될 겁니다."다음날 철물점 부럼씨가 앞니 빠진 얼굴로 씨익 웃으며 철물점을 비워놓고 자신을 따라오라고 손짓한다. 철물점 옆 건물의 계단을 내려가 보니 간이 침실과 주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가스레인지가 갖춰진 기름때 묻은 그의 주방 선반에는 갖가지 양념들이 있었다. 그가 내게 물었다.
"닭 요리를 할 수 있습니까?""물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