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새로운 좌파는 어디로?

긴축에 맞선 좌파들의 투쟁은 이제 시작이다

등록 2015.10.05 16:42수정 2015.10.05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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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말에 있었던 그리스의 조기 총선에서 시리자와 치프라스가 우파 신민주당을 꺾고 다시 집권당의 위치를 유지하게 됐다. 치프라스가 긴축을 중단하겠다던 약속을 어기고 트로이카에 굴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과가 나왔다.

시리자뿐 아니라 각 당의 득표 결과를 보면 시리자가 승리했던 지난 1월 총선 결과와도 비슷하다. 하지만 그것은 겉보기만 그럴 뿐이다. 중요한 내용상의 차이점이 있다. 지난 1월 총선 때 시리자는 트로이카와 그리스 주류 언론들의 집중포화와 공격을 받으면서 선거운동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트로이카와 주류 언론의 우호적인 반응과 지원사격을 받을 수 있었다.

더구나 시리자는 그리스 주류 언론과 한목소리로 반긴축 극좌파 정당을 매도하기까지 했다. 지난 1월에 시리자는 긴축 반대와 '대안은 있다'고 주장하며 선거운동을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른 주류정당들과 같이 '긴축 수용말고 대안은 없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지난 1월에 시리자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노동대중의 희망과 투지에 힘입은 것이었다. 반면 이번에 시리자가 이용한 것은 대중의 실망과 사기저하였다. 즉, 치프라스는 '긴축을 중단할 수는 없고 대신 더 인간의 얼굴을 한 긴축을 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우파인 신민주당보다 훨씬 덜 강하게 덜 열의를 가지고 긴축정책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부패한 우파보다는 굴복한 좌파가 낫다'는 이 같은 차악론은 어느 정도 먹혔다. 그리스 민중들은 1월에는 '최선'이라고 기대하며 시리자를 뽑았지만, 이번에는 '차악'이란 심정으로 시리자에게 표를 줬다.

그 결과로 계속 정권을 유지하게 된 시리자 정당과 정부는 이미 성격이 변화하고 있다. 이 당은 더 이상 긴축에 반대하는 다양한 좌파와 활동가들의 연합체라기보다, 긴축을 수용한 치프라스와 그의 충성스런 지지자들의 정당으로 보여진다. 치프라스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좌파 연합체로서 성격도 희미해졌다. 시리자 정부의 전 재무장관이었던 바루파키스는 '치프라스는 영혼을 팔아서 시스템의 일부가 됐다'고 한탄했다.

이번 선거에서 시리자 내의 좌파들이 왼쪽으로 이탈해서 건설한 '민중연합'이 득표율 3%를 못 넘으며 의석을 하나도 얻지 못한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2.9%를 득표했는데, 돈도 인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창당 한 달만의 선거라는 점이 불리했을 것이다.


특히 시리자가 퍼뜨린 사표 논리도 작용한 것 같다. 즉 '지금 같은 박빙 상황에서, 민중연합을 찍으면 시리자가 패배하고 우파인 신민주당이 득세한다'는 논리였다. 공산당 등이 시리자보다 오히려 민중연합을 더 공격한 것이 좌파의 분열상을 더 부각시킨 점도 있을 것이다. 민중연합과 다른 극좌파들의 선거연합이 이뤄지지 않은 것도 아쉽다. 그랬다면 긴축 반대와 투쟁 호소의 목소리가 의회에 반영될 기회가 충분히 생겼을 텐데 말이다.

민중연합 자신의 실책도 있었다. 민중연합은 시리자와 차별성을 긋겠다며 유로존 이탈(과 드라크마화로 복귀)을 지나치게 강조했다. 일반적인 반긴축 반자본 과제보다 더 강조했다. 이를 이용해 시리자와 주류언론은 민중연합을 '드라크마 좌파'라고 매도했다. '드라크마화로 돌아가면 통화가치 하락과 물가 인상 속에 오히려 저소득층이 더 힘들어진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어떤 통화냐가 아니라 '긴축 중단'이 핵심이며, 그것에 수반되는 유로존 이탈 속에 기층 민중의 삶을 위한 무슨 조치들이 필요한가가 쟁점이 돼야 했는데 말이다. 트로이카에 굴복해 긴축을 수용한 시리자와 긴축을 거부하며 계속 싸우려는 좌파의 구분이 더 중요했다.

결국, 민중연합은 시리자의 굴복이 낳은 대중의 냉소·환멸을 저지하는 방파제를 세워내는 데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 속에서 큰 폭의 투표율 하락이 나타났고, 정치권 전반을 비꼬고 조롱해 온 '중도연합'이 일부 표를 가져갔다.

그럼에도 시리자의 일부였지만 그것에 용해되지 않은 좌파가 2012년 이후 최초로 홀로서기를 시작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본격화할 긴축에 맞선 투쟁은 이제 시작이고 진정한 승부는 선거보다는 여기서 판가름 날 것이기 때문이다.

시리자에서 독립적인 좌파의 존재와 그들이 건설할 반긴축 투쟁과 연대는 너무나 중요하다. 민중연합이 이번에 얻은 15만 표와 수천의 활동가들은 그 종잣돈이다. 시리자 정부가 긴축을 강행하면서 더 많은 이탈이 있을 것이고, 민중연합은 그들을 흡수하며 더 큰 단결과 투쟁으로 나가야 한다.

시리자라는 더 큰 바닷속으로 들어가서 함께 배우고 좌파적 목소리를 냈지만, 용해되지 않고서 나온 극좌파들은 여기서도 중심적 구실을 해야 한다. 새로운 나치의 성장 가능성과 위협이 심각해지는 지금, 이것은 특히 중요하다. 그리스에서 나치의 위험은 실질적이다. 최근에 교육방송 다큐영화제 'EIDF 2015'에서 상영한 <아고라: 민주주의에서 시장으로>를 보면 이것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거기에는 긴축 5년을 거치며 "나는 짐승이나 쓰레기가 아니다"라며 절규하는 사람들 속에서 급속히 성장하는 황금새벽당이 나온다. 이들이 흑인 이민자의 등에 칼로 나치 문양을 강제로 새긴 살벌한 장면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다큐멘터리는 2011년 투쟁의 절정기에 신타그마 광장에서 거대한 집회와 점거, 자유로운 토론과 발언 속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꽃피웠던 모습도 보여 준다. 시리자를 넘어선 좌파의 진정한 과제는 바로 이런 투쟁과 희망을 되살리는 것이다.
#그리스 #시리자 #치프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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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보다 사람이 목적이 되는 다른 세상을 꿈꾸며 함께 배우고 토론하고 행동하길 원하며 <다른세상을향한연대>의 실행위원입니다. 더 많은 글들은 여기서 봐 주세요. http://anotherworld.kr/ 페이스북 계정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01746737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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