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북 안주중학교 시절 은사이자 1955년 당시 서을의 한 사립대학에서 강사로 있던 바리톤 황병덕 선생님은 자신의 첫 월급 봉투를 몽땅 나에게 주면서 비행기표를 사는데 보태라고 했다. 선생님의 한국가곡선집 표지.
황병덕 한국가곡선집 표지
그런데, 여권과 비자를 손에 쥐어 법적 절차는 해결했으나, 미국행 비행기표를 끊기 위한 비용이 문제였다. 400달러나 되는 비행기표 값을 마련하기 위해 나는 무려 6개월을 고생해야 했다. 내가 미국행 비자를 받았던 1954년 우리나라 일인당 국민소득이 88달러였으니 400달러란 일반인들에게 엄청난 돈이었다. 더구나 달러가 귀하던 시절이어서 개인이 함부로 달러를 사거나 팔 수 없도록 정부에서 엄격하게 규제를 하고 있었다. 다만, 미국행 비자를 받은 사람에 한해서 200달러를 바꿀 수 있는 증서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나는 우선 한국은행으로부터 받은 '200달러화 증서'를 들고 암시장을 찾아 갔다. 암달러상이 나와 함께 한국은행을 찾아가서는 원화로 달러를 사들이고는 달러 일부를 커미션으로주면, 나는 그 달러로 종교 달러를 사들이는 방법으로 돈을 마련할 요량이었다. '종교 달러'란 한국 선교비 명목으로 미국 종교단체 등에서 유입되는 일종의 수표(check) 였다. 당시 비행기 회사에서는 티켓값으로 현찰 달러 외에 유일하게 종교 달러를 받았다.
일반적으로 암시장에서 종교 달러의 가격은 현찰 달러의 반값에 불과했다. 가령 현찰 10달러는 암시장에서 종교 달러 20달러로 교환되었다. 모두가 미국행을 준비하며 여러 통로를 통해 얻게된 정보였다. 한푼도 없는 처지에서 6개월 동안 나를 써줄 직장도 없거니와, 설사직장을 잡는다 해도 400달러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몇 년이 소요될 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몇 차례의 '환전 게임'을 거친 후에 200달러의 종교화가 내손에 쥐어졌다. 하지만 나머지 200달러가 문제였다. 그때부터 나는 알고 있는 친구들과 고향의 선후배들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으나, 예상대로 성과가 썩 좋지 않았다. 끼니도 떼우기 힘든 시절에 '유학가게 되었으니 도와달라'는 것은 사치로 받아들여지거나 시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딱 알맞을 성 싶은 요청이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평생 잊혀지지 않는 일을 겪기도 했다.
어느날 서울의 종로통 다방 앞을 지나치고 있다가 우연히 평안도 안주 중학교 시절 선생님을 마주치게 되었다. 후에 한국의 대표적인 성악가 가운데 하나로 명성을 떨친 바리톤 황병덕 선생님이었다. 내가 북한에서 내려온 줄 모르고 있던 황 선생님은 너무도 반가워 하셨고, 곧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는 소식까지 전하자 매우 대견해 하셨다. 그러더니 갑자기 호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내어 내 손에 쥐어 주시면서 "얼마 안 되지만 유학비용에 보태 쓰라"고 하셨다. 막 서울의 한 사립대학교 강사로 취직이 되어 받은 첫 월급이라며 멋쩍은 듯 말씀하셨다. 코끝이 시큰해질 정도의 사제지간의 배려에 나는 몸둘 바를 몰랐다.
나는 황 선생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었으나, 그 은혜를 갚지 못한 것을 한으로 남겨 두어야 했다. 최근에서야 그가 몇 년 전 서울에서 돌아가셨다는 얘기를듣고 가슴을 쳤다.
여하튼 비행기표 값을 마련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으나 쉽게 채워지지가 않았다. 미국의 대학교에는 미리 연락해 등록 기일을 연기해 두어 그나마 다행이었으나, 비행기표를 예약했다가 취소하기를 반복하니 항공사 측에서 야단이었다. 막판 채워질 듯 채워질 듯 하던 몇 십 달러가 채워지지 않아 예약을 취소하기도 했다. 무려 10차례나 예약 취소를 반복하자 한 번은 직원이 "동경에 있는 항공사에 국제전화한 비용이 비행기표값 보다 더 들겠다"고 불평을 했다. 당시 미국행 비행기는 여의도에서 출발하여 동경에서 하루를 쉬고 미국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동경의 항공사에도 연락하여 함께 취소해야만 했다.
결국 비자를 받은 지 6개월이 다 되고 나서야 비행기표 값이 겨우 마련되었다. 이제 여의도 비행장에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일만 남게 되었다. 드디어 미국행 비행기를 타던 날, 묵고 있던 친구 집을 나와 발권을 하기 위해 반도 호텔 안에 있던 항공사 사무실로 갔다. 사무실에 들어가기 위해 호텔 문을 열고 들어가자 뜻하지 않게 '경복고 모자회(母子會)'에 소속된 친구의 어머니들 4,5명이 나를 환송한다며 나와 있었다. 몇몇 친구들도 기다리고 있었다.
못 잊을 여인들... "널 보면서 늘 기적을 보았단다"그런데, 서로가 석별의 정을 나누는 자리에서도 막판 '걸림돌'이 발생해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막 비행기표를 끊기 위해 400달러를 내니 환율 영향으로 비행기표 값이 올랐다며 몇 십불이 부족하다고 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여 사무실을 나서는 나를 본 친구 어머니들은 무슨 사단이 벌어진 것이라 짐작하고는 걱정스런 얼굴들을 하고 잰걸음으로 모여들었다.
사정을 들은 어머니들이 한쪽 구석에서 잠시 쑥덕대는 듯했다. 그러더니 모두가 지갑을 열어 추렴을 해서 돈을 쥐어 주며 "아들이 유학가는데 비행기를 못 타면 안 되지"라며 "어서 비행기표를 끊으라"고 했다. 수 십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생각해 보아도 늘 따뜻한 이웃들이 일으킨 이같은 '기적' 덕분에 오늘날의 내가 있었다는생각을 하게 되고 감사해 한다.
떠나던 날 평생 잊지 못할 두 가지 '사건'이 떠오른다. 반도호텔을 찾은 친구의 어머니들과 두어 명의 친구들 외에 눈에 띄는 이화대학 학생 한 명이 끼어 있었다. 조금은 알고 지내던 친구의 여동생이었다. 환송객들과 이런 저런 인사를 나누던 와중에 누군가가 호텔 밖으로 불려나갔다 들어오더니 "밖에서 이화대학 학생이 전해 주더라"며 쇼핑백을 건네 주었다. 열어보니 금방 산 것으로 보이는 와이셔츠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이화대학 학생은 내가 입고 있던 와이셔츠가 너무 낡고 초라해 보여 급히 노라노 양장점에 가서 사 왔다고 한다. 당황스러웠으나 그녀의 마음 씀씀이가 아름답고 고마워 유학생활 내내 기억 저장소에 담아 두었다. 그녀는 나중에 나의 평생 반려자가 되었다. 그 과정은 나중에 따로 쓰기로 한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반도호텔에서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고 홀로 버스를 타고 여의도 비행장으로 가서는 탑승장 대기실에 앉아 이런 저런 상념에 잠겨 있었다. 16세 때 온갖 난관을 돌파하며 홀로 내려와 갖은 고생을 하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고향의 부모님과 동생들의 얼굴 모습, 그리고 고향 동네에서 어렸을 적 일들이 떠오르며 우수에 젖어들었다. 살아남기에 급급하여 기억의 저만치에 밀쳐둔 것들이었다.
막 벤치에서 일어나 탑승장 안으로 들어가려던 참에 얼핏 보기에도 옷매무새가 점잖아 보이는 여자 한 분이 급한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어머니였다. 그 친구의 유학을 돕는다며 종종 집을 방문했을 때 늘 부드럽고 따뜻하게 맞이해주던 분이었다. 친구의 어머니는 홀로 앉아 있을 나를 생각하니 너무 안 됐다는 생각이 들어서 급히 택시를 타고 왔노라고 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녀가 막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내게 남긴 말은 두고 두고 잊혀지지 않는다.
"도원아, 나는 성경에서 늘 기적 이야기를 읽었단다. 그런데, 너는 '눈으로 보는 기적'이었어. 너를 보면서 늘 기적을 보았단다. 하나님이 너를 돌보실 거야. 건강히 잘 다녀 오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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