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그림. '정리왕'인 아이가 맥도널드에서 알바를 하면서 느끼는 마음을 나타낸다.
양철북
여고생 다섯 아이는 왜 단편소설로 인문학을 배우려고 할까요? 이 아이들은 왜 학교 수업을 다 마친 뒤에 따로 모여서 단편소설을 더 읽으면서 '교과서 바깥 세계'를 배우려 할까요?
다섯 아이는 다섯 아이대로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새로운 이야기를 배우려 합니다. 다섯 아이는 다섯 아이대로 동무들을 저마다 사랑하기 때문에 '동무가 어떤 마음인가를 헤아리면서 한결 가까이에 있'고 싶어서 단편소설로 인문학을 배우려 합니다.
다섯 아이는 독후감 쓰기를 하려고 단편소설을 읽지 않습니다. 게다가 '더 많은 책'을 읽지 않고, '더 많은 작품을 찾아서 읽지'도 않아요. 왜냐하면, 이 다섯 아이는 '문학소녀'가 되려는 뜻이 아니라, '내 삶을 스스로 똑똑히 바라보면서 씩씩하게 일어서서 즐겁게 노래하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미지가 나쁜 애가 아닌 건 안다. 아주 명랑하고, 착하고, 뭐든 열심히 하려고 하고……. 하지만, 아니 그래서 나는 미지의 웃음이, 미지의 대답이 좀…… 재수 없었다. 자존심도 상했다. 미지가 공부를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보다는 못했다. 나보다 공부를 못하는 미지가 같은 소설을 읽고도 무언가 더 많이 알고 있는 듯이 말하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했다. (109쪽)열여덟 해를 살아온 여고생 나이는 '어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리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열여섯 해를 살아온 남중생이나, 학교를 안 다니고 열세 해를 살아온 어린이한테는 '나이가 많'아요. 다섯 살 아이한테도 나이가 한참 많으며, 갓 태어난 아기한테도 나이가 많을 테지요.
나이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대수로운 대목이란, 스스로 배우려 하느냐 아니냐입니다. 스스로 배우려고 할 때에 국어교사인 리쌍 님은 아이들한테 수수께끼를 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국어교사가 들려주는 수수께끼를 듣고는 '정답 찾기'나 '해답 찾기'를 하지 않습니다. 다섯 아이는 다섯 아이대로 저마다 '실마리 생각하기'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다섯 여고생은 단편소설을 읽으면서 '생각'을 합니다. 단편소설을 쓴 사람이 어떤 마음인가를 생각하고, 단편소설에 나오는 사람들 마음을 생각하며, 이 단편소설을 읽는 내(여고생) 마음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이 단편소설을 읽는 동무들 마음을 생각해요.
"그래, 나도 딱 그런 상황 오면 채널 돌리고 싶어지더라. 약자를 배려한다, 스포츠 정신이다, 말들은 많아도 그냥 메달에 굶주린 사람들 같아." (1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