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행 야간열차> 표지사진.
들녘
책은 전체적으로 그레고리우스가 프라두의 인생을 쫓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베일에 싸여 있던 자신을 알아가는 중이었다. 수많은 가능성 중 단 하나를 부여잡고 살아왔던 지난 삶에서 도망친 것. 아직 꽃피지 못한 다른 가능성을 향해 다시 한 번 손을 내미는 중이었다.
그렇게 5주간의 여행을 마치고 그레고리우스는 다시 본인의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미 그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알았다. 더는 이곳에 묶여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의 또 다른 가능성은 우연에 의해 이끌렸던 리스본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몇 년 전에 처음 읽었고 그 뒤로도 생각이 날 때면 다시 펴들었다. 나는 그레고리우스처럼 지금 이곳을 떠나 그 어떤 공간으로도 도망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책을 다시 읽을 때면 나는 잠시라도 지금 이 삶의 무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프라두의 정신은 의심과 고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그의 그 의심과 고민이 내게 삶을 가볍게 인식할 수 있는 지혜를 주었다.
내게 삶이 무겁게 여겨졌던 이유는 사실 단순했다. 내게 허락된 삶의 모습이 지금 이것 하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가야 할 길이 지금 내 앞에 놓여있는 이 길 하나라는 생각에 욕심이 생겼고 그 욕심이 실현되지 않을 것 같아 불안했다. 그래서 여유를 잃게 된 거였다. 여유를 잃은 삶은 세상 그 무엇보다도 무겁게만 여겨졌다. 하지만 프라두는 말했다. "우리 인생은 바람이 만들었다가 다음 바람이 쓸어갈 덧없는 모래알, 완전히 만들어지기도 전에 사라지는 헛된 형상"이라고.
나는 내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나갈 것이다. 삶은 언제든 다음 바람이 쓸어갈 덧없는 모래알이기 때문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 내가 하게 된 이 생각은 그레고리우스가 프라두를 이해하며 얻게 된 자각과도 같았다. 이 자각이 57년간 똑같기만 했던 그레고리우스의 삶을 또 다른 가능성의 세계로 이끌어 준 것이다.
우리를 다른 삶으로 이끌어 줄 환상 여행. 우리는 비행기 안에서 뿐만 아니라 매일 아침 거리를 나서면서도 이런 환상 여행을 꿈꾸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도 벗어나고 싶은 현실이, 이 무거운 현실이, 이게 뭐라고, 쉽게 버려지질 않는다. 그럴 땐 지금 이 현실을 집착할 필요가 없는 그 무엇, 수많은 가능성 중의 하나일 뿐인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그래서 가벼운 그 무엇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떠나기도 쉬울 테고, 또 머물러 있더라도 더 여유롭게 머물러 있을 수 있게 될 것이므로.
지난 2013년에 개봉했던 제레미 아이언스 주연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이 책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영화의 분위기와 내용은 책 못지 않게 지적이고 진지하고 매력적이다. 하지만 때로 어떤 책은 전체적인 줄거리로는 결코 그 책이 내포한 정신을 오롯이 드러내지 못하기도 한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이 책의 정신은 버릴 수 없는 모든 문장 하나, 하나에 새겨져 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들녘,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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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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