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훈
이희훈
5월 14일 강기훈 무죄 판결 이후, 그 당시 고초를 겪은 한 후배는 "우리가 김영균에게 라이터를 건넸다는 '분신 배후'가 됐다면 강기훈 유서대필사건은 아예 없었을지도 모르죠"라고 말했다. 상상도 하기 싫은 가정이지만 전혀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아니다.
당시 정권은 정국 반전의 '한 방'에 혈안이 돼 있었다. 김영균이든 김기설이든, 후배를 죽음으로 내몬 '패륜'사건의 주인공이 필요했을 뿐이다. 강기훈이 아니라면, 다른 누군가가 '강기훈'이 돼야 했다. 나의 동료와 많은 선후배들은 '강기훈'이 되지 않았기에, 엉뚱한 이적단체 구성원이 돼 수감과 수배 생활을 해야 했다.
1894년 10월 프랑스는 유대인 사관 드레퓌스를 독일 스파이 혐의로 체포, 종신형을 선고한다. 증거는 드레퓌스의 필적이었고,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도 재판에 크게 작용했다. 재판부는 결정적인 증거인 필적이 드레퓌스가 아닌 드레퓌스 상관의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를 묵인한다. 10년이 지난 1904년에 재심이 청구됐고, 무죄가 확정된 것은 선고가 내려진 뒤 12년 만이었다. 드레퓌스는 육군 소령으로 복직됐고, 이 사건은 프랑스 인권을 신장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한국판 드레퓌스사건'이라고 불리는 강기훈 유서대필'조작'사건은 무죄 판결을 받기까지 무려 24년의 시간이 걸렸다. 2009년 서울고법이 강기훈의 재심청구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검찰은 곧바고 대법원에 항고했다. 대법원은 검찰 항고 이후 3년이나 흘렀지만 답이 없었다. 그 세월 동안 강기훈은 간암이라는 병을 얻어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최근에도 건강이 더 악화돼 재판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24년 만의 무죄 판결. 그러나 당시 사건을 조작한 수사 당국이나 검찰, 숱한 의문점이 있는데도 유죄로 판결해 강기훈을 옥살이시킨 사법부는 일말의 반성조차 없다.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우라던 김지하 시인, 어둠의 세력 운운하며 죽음의 배후를 캐라고 연일 목소리를 높인 박홍 총장, 유서 대필을 기정사실화 하며 운동진영을 패륜으로 몰아간 <조선일보>를 위시한 보수 언론들. 강기훈이 무죄면 당연히 이들은 유죄다.
또 강기훈을 파렴치범으로 조작해 기소한 검사와 유죄판결을 내린 판사들은, 사과는 물론 지금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올바른지 반문해봐야 한다. 당시 구속영장을 직접 청구하는 등 사건의 주임검사를 맡은 신상규는 지금 동덕여대 이사장으로 재임하고 있다. 2심에서 유죄를 선고한 배석판사 가운데 한 명인 부구욱은 현재 영산대 총장과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 회장을 맡고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파괴해버린 이들이 교육현장에 몸담고 있다는 것, 소름끼치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강기훈이 무죄면 국가는 유죄다... 반성과 책임 보여야그뿐만 아니다. 당시 법무부 장관이던 김기춘은 박근혜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고, 당시 서울지검 강력부장으로 사건을 지휘한 강신욱은 대법관을 역임했다. 담당검사이던 남기춘과 곽상도 등은 여전히 권력의 언저리에 자리하고 있다. 강기훈이 3년의 옥살이 끝에 간암을 얻어 지금까지 사투를 벌이는 동안, 이들은 여전히 권력을 쥐고 살았다. 강기훈의 무죄 확정에도 이들이 일말의 반성도 없이 똑같은 삶을 살 수 있다면, 법의 존엄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스스로 거취를 되물어야 할 때다.
단순히 경찰, 검찰, 법원의 실수와 오류로 빚어진 일이 아니다. 정권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그들은 있지도 않은 패륜을 기획했다. 강기훈의 24년 인생은 이들에 의해 망가졌다. 내 주변의 많은 선후배들은 분신 배후가 되지 않기 위해 '이적단체 구성원'이라는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했다.
5월 18일, 강기훈이 당시 판검사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당연하다. 그러나 이들이 사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가가 직접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국민들에게 약속하는 것이다. 드레퓌스사건이 프랑스 역사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국가가 통렬한 반성을 하고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강기훈은, 나는, 1991년에 '어둠의 세력'이 된 수많은 우리는, 유서대필사건의 무죄 확정에도 여전히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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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륜' 기획자들... 강기훈이 무죄면 당신은 유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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