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아이들에게 해준 사인만 수백 여장이다.
김희선
시작은 작은 호의였다. 순박해 보이는 여자아이가 나에게 이름을 물었다.
"선생님, 이름이 뭐예요?""김희선이야.""와! 진짜 한국인 같다. 한국어로 어떻게 써요?""진짜 한국인이야. 적어 줄게. 자, 이렇게 쓰는 거야. 신기하지?"그렇게 이름을 적어 준 게 화근이었던 것 같다. 나의 한국어 이름이 적힌 종이를 받아든 아이는 기뻐하며 그대로 단숨에 달려 나갔다. 그리고 나머지 아이들에게 자랑했나 보다. 초등학생 때는 별게 다 부러울 나이다. 아이들은 아직 어리니 감정을 그대로 표출한다. 부러웠던 꼬마들이 어느새 벌떼가 되어 모여 들었다.
"라오싀, 워이에야오! 워이에씨에게이워!(선생님 저도요! 저도 해주세요!)"그게 뭐라고 입소문을 타고 전교생에게 퍼져 매일 이십 여장 이상씩 사인을 했다. 꽤 해준 것 같은데도 내 사인을,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국인의 사인을 원하는 아이들은 날마다 늘어났다. 귀여웠던 아이들이 점점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절하기엔 너무 멀리 왔다. 때로는 복사해서 나눠주고 싶은 심정이 들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이들의 요구사항은 더욱 업그레이드되고 있었다.
"선생님,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도 한글로 적어주세요!""선생님, '김수현, 전지현, 이민호'도 한글로 사인해주세요!"헐-이다. 이 순진한 아이들을 어쩌면 좋을까. 보다 못한 선생님이 나서서 화를 내며 아이들을 쫓아냈다.
"니먼비에다라오라오싀, 콰이디알후이취바!(너희들 그만하고 교실로 돌아가!)"그제야 아이들은 눈치를 보며 아쉬운 듯 흩어졌다. 이처럼 종종 선생님이 구출(?)해 주긴 했지만, 실습이 끝나는 날까지 쉼 없이 사인을 해야 했다. 일부러 나가지 않고 사무실에만 박혀 있어도 누군가가 끊임없이 종이뭉치를 가져와 해맑게 웃으며 들이민다. 방법이 없다. 꼼짝 못하고 앉아 이름을 썼다. 내 사인을 못 가진 평화소학교 학생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사무실에서 나와 화장실이라도 갈라치면 주위에 구름떼같이 몰려들어 오고가는 길을 배웅한다. 거기다 매일같이 뽀뽀, 악수, 포옹 등을 해달라고 조른다. 난감할 때도 있지만 착하고 귀여운 아이들의 요청을 거부할 수도 없다. 한껏 안아주면 국경을 초월한 따스함이 온몸으로 파고든다.
생각해보면 그때 약간 연예인병이 걸렸던 것도 같다. 매일같이 한껏 치장하고 미스코리아처럼 미소를 머금은 채 손을 살랑 살랑 흔들고 다녔는데, 지금 생각하면 단단히 미쳤던 것 같다. 현재는 예전처럼 다시 모자를 푹 눌러쓰고 트레이닝복을 입고 다니는데, 인기를 구가하던 그 시절이 가끔씩 그립긴 하다.
평화소학교 귀요미들의 감동적인 깜짝 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