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선인학원 학내 분규 당시 언론 보도들.
인천대학교 총동문회 제공
해방 직후 토지개혁과 사학권력 형성의 연관성을 살펴보자.
당시 죽산 조봉암은 북한이 먼저 감행한 토지개혁과 중국의 국공내전이 공산군의 승리로 돌아간 요인 중 하나가 토지의 몰수와 분배에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이승만에게 농지개혁의 복안을 제시했다.
"개인의 재산권을 어느 정도 보장하면서, 농지를 분배하는 게 최선입니다. 그래야 빠른 속도로 토지 균등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토지개혁은 농지에 한정하되 강제몰수나 무상분배는 피하고 정부가 개입해 현물보상을 하는 것입니다. 정부 방침을 천명하십시오"<'조봉암 평전' 431쪽.(한길사, 이원규 지음)>죽산은 유상몰수 유상분배와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섞은 절묘한 방안으로 농지개혁을 단행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 기득권을 누려온 지주들은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학교 소유 전답 및 문교재단의 자산인 농지는 수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알고, 대지주를 중심으로 재산 보존의 수단으로 사학 설립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여기서 문교재단이란 문교부 장관의 허가를 얻은 유치원·학원·장학회 또는 교화사업을 경영하는 재단법인을 말한다.
1949년 제정된 '농지개혁법'과 함께 1951년 제정된 '문교재단 소유 농지 특별보상법'에 따른 특혜로 인한 지주들의 사학재단 설립은 재산 감소를 막는 효과적 대응책이 됐다. 당시 특별 보상을 받은 문교재단의 분포 비율을 보면, 사학재단 64%, 사찰·불교재단 13%, 향교재단 12%, 종교재단 6%였다. 실제로 해방 직후 신설된 대학들은 설립자 혹은 지역유지의 토지 기부를 바탕으로 설립된 경우가 많았다. 이는 교육적 차원에서 자신의 부를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자신의 부와 명예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대학 설립 기준 완화, 부실 사학 부추겨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사학의 공공성 제고를 표방하며 '사립학교법'을 마련했지만, 사학이 운영난을 겪으며 교원을 대량 해고하고 장학금을 축소하자 1년도 안 돼 사학 정비를 포기했다.
그 후 사학권력은 족벌체제 경영을 구축했고, 민주화시대인 1980, 1990년대를 경과하면서 사학비리는 다시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웬만한 사립대 치고 사학비리 문제 등으로 몸살을 앓지 않은 학교가 없었을 정도였다. 여기다 어느 정도 여건만 갖추면 대학 설립을 허용하는 대학설립준칙주의를 1997년 도입하면서 부실 사학 설립을 부추겼다.
이때부터 2000년까지 설립된 사립대 41개 중 대부분이 교원 확보율, 교지·교사 확보율에서 법정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 더욱이 이 사학들은 대학 자율화를 명분으로 IMF 외환위기 사태 전후로 등록금을 대폭 올리기 시작했다. IMF 사태 이전에는 13% 이상씩 올리다가 2000년부터는 6% 이상씩 올려, 등록금 1000만 원 시대를 열었다.
소위 말하는 민주정부 10년 동안 신자유주의 교육 정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대한민국에서 교육의 공공성은 물적 토대를 잃어버리게 됐다. 성균관대와 중앙대를 대기업들이 인수하면서, 재벌 기업이 지배하는 사립대학은 '화려한 외모'를 얻은 대가로 영혼을 빼앗긴 신세로 전락했다. 대학 스스로 돈벌이에 나섬으로써, 공적인 학문기관으로서의 정체성에 심각한 손상을 자초했다.
대학의 기업화는 '파우스트의 거래'에 빗대어 비판을 받기도 한다. 대학이 이윤추구라는 욕망을 쫓다가, 결국 영혼을 팔아버린 신세가 된 셈이다. 시카고 대학 허친스 총장은 "어떤 기관이 돈을 벌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결정한다면, 반드시 그 혼을 잃어버리고 만다"고 대학의 상업화를 경고했다. 이처럼 대학이 기업화됨에 따라 '자유롭고 평등한 학문공동체'라는 근대 대학의 이념은 급격히 퇴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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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중앙대, '화려한 외모' 얻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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